한 없이 마냥 설레는 마음
180716
첫 출근을 했다. 내 자리를 안내받았다. 책상 위에 새 사무 용품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이게 뭐라고 또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일하다 보면 금방 지저분해지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넓은 책상이 기분 좋았다. 천상 신입 사원의 마음으로 한없이 설레었다. 앉아 보니 알겠더라. 그동안 내 책상이 필요했다. 웃긴 말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어디라도 내 자리가 필요했던 거다.
첫 퇴근을 했다. 첫날이니 뭐 제대로 한 것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는데도 몸이 천근만근이로구나. 쉬는 동안 책상이 낯설어진 몸은, 고작 8시간 근무에도 온통 배배 꼬인다. 이전 회사에서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지난 날들이 꼭 꿈만 같다. 다시 그렇게는 절대 못해. 아니 안 해. 더 이상 까라면 까는 내가 아니야. 벌어지지도 않는 상황을 미리 경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180717
작은 회사라서 하루 만에 직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대강 익혔다. 젊은 회사라는 이미지답게 온 직원을 통틀어 (역시나)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대표님과는 5살 차이. 가장 어린 직원과는 무려 12살 차이가 난다. 맙소사. 이렇게 독보적으로 나이가 많다니. 직책이 따로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그냥 영어 이름으로 부른다. 말로만 듣던,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다. 이런 것쯤 금방 가뿐하게 적응할 줄 알았는데 입에서 다른 사람들의 영어 이름이 잘 안 나온다. 어쩐지 오글거린다. 팀장님! 사장님! 같이 직책을 부르는 편이 내겐 훨씬 편하고 익숙하다.
퇴근길, 나보다 12살 어린 J 가 "내일 봐요” 하는대다 대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녕히 계세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어서 몸이 삐걱대는 기분이지만, 어색하고 오글거리면서도 신난다. 새로운 직장이라니. 감개가 무량하다.
아, 내 영어 이름은 어려서 좋아했던 해외 여배우의 애칭으로 정했다. 중학생 때부터 아이디가 필요할 때면 써 왔던 이름이다. 다른 직원들이 이름의 이유를 물어봐서 얘기했더니, 아니 글쎄, 이 여배우를 아무도 모른다. 이 90년대생들 어떡하지.
180718
6월 말부터 '여름 싫어, 여름 싫어'를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그래서 한 여름 입사는, 감사하면서도 괴로웠다.
내가 무더위에 출근하는 법. 원래 나가야 하는 시간보다 한 시간쯤 일찍 나선다. 버스 정류장까지 서둘지 않고 걷는다. 멀리서 건널목이 파란 불로 바뀌는 걸 봐도 뛰지 않는다. 5-10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 안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한 대쯤 그냥 보내버리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회사까지 걸을 땐 지그재그 그늘을 찾아가며 걷는다. 이 모든 건 한 시간쯤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해지는 속도라서 일찍 나가는 수밖에 없다. 늦어서 서둘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더운데 더 더워진다. 마음이 급해지면 열이 올라온다.
그러다 보니 근로 계약서에 도장도 안 마른 애송이 신입 직원이 이틀째 일등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내 페이스로 여유 있게 도착하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땀이 난 벌건 얼굴을 가라앉히고 뽀송한 얼굴로 그제야 출근하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다. 아무래도 나, 출근이 신나는가보다.
180719
점심을 먹는데 누군가 이런 얘길 했다. '성장'과 '확장'은 다르다고. 나를 필두로, 회사는 몇 명의 직원을 추가로 충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회사의 규모를 확장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확장과 성장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 양쪽 모두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회사의 성장에 대해 직원들 모두가 함께 고민하는 것 같아서 설렜다.
오후에는 대표의 외부 강연에 따라가 함께 강연을 들었다. 소셜 벤처를 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묻는 패널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던 걸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걸 실현시켜야 하는 게 어려웠다고 대답했다. 내 귀에는 그 대답이 너무 멋져서 '우와, 대단하다' 감탄했다. 내가 얼마나 새로운 회사에 들어오게 된 건지 새삼 실감이 났다.
어디고 천국은 없겠지만. 꽤나 좋은 기운들에 둘러싸여 일하는 기분이다.
180720
점심을 먹으며 내 면접 얘기가 나왔다. 이전 회사, 온라인 쇼핑몰 경력이 가장 플러스가 됐다고.
이전 나의 화려한(!) 경력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직무에 지원하면서, 그간의 경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좀 아쉽기도 했는데, 세상은 어쩌면 이렇게 재밌을까.
"의미 없는 패스는 없대."
"뭐?"
"줄창 하다 보면 분명 뭔가로 연결되는 거야. 놓치거나 떨구지 말고 하다 보면 하는 사람도 모르게 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의미 없는 패스는 없다고."
《이만큼 가까이》, 253p 정세랑
정말로, 의미 없는 패스는 없네. 내가 좋아하는 책 속 구절을 되뇐다.
대청소를 하면서 화분 하나를 얻었다. 사무실 입구 선반에 놓여 있던 주인 없는 화분을 내가 데려와 내 이름을 써 놓았다. 점점 내 자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출근한 첫 주, 매일매일 잔뜩 신이 나 있는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회사의 예쁜 점만 눈에 들어왔다. 출근길 만원 버스도 사뿐사뿐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탔다. 가장 괴로워하는 한 여름 무더위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