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서른 여섯의 봄, 치앙마이

2017. 10. 19-20의, 치앙마이 마지막 기록

by 노니

아침이다, 올드타운을 감싼 해자 주변을 산책하러 나왔다.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풍경. 아침이란게 원래 이렇게 좋은거다, 만원 버스에 치여 왔다 갔다 출근하던 예전에도 그랬다. 두 정거장 미리 내려 성북천을 걸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좋은 걸 좋게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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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이렇게 아름다왔었나, 새삼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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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주변을 산책하고, 도서관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신나게 산책하고 도서관에 들어 갔더니 직원분들이 막는다. 오픈은 9시. 오픈 시간을 잘 못 알고 일찍 와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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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40분 쯤 더 걸었다. 하하. 걷다가 어느 골목 안, 바나나 그림이 멋지게 그려져 있는 가게가 있어 슬금 슬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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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튀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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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랑 감자랑 고구마를 튀긴 주전부리였다. 한봉지 20바트. 생각보다 맛났다. 길을 걸으면서 입술에 기름이 번들 번들해지도록 주어먹고. 편의점에 들러 커피 우유랑 막대 과자를 사서 도서관에 출근했다. 그런데 어머나.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벌써 며칠째 계속 보던 아이들이 나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기들 음료수도 사오는건데.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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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생》을 클리어하고.

그동안 오며 가며 말을 걸어보니 아이들은 영어를 거의 못했다. 나도 못하고. 덕분에 별 다른 얘기는 할 수는 없었지만 며칠째 만나고 있어서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으며 눈 인사를 건냈다. 그런데 이 아이들 드디어 오늘 공연인걸까, 평소와 다르게 하나씩 하나씩 전통 의상으로 갈아 입고 들어왔다. 책을 다 읽고 나가기 전, 너희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선뜻 주르륵 나와서 한 줄로 섰다. 아이고 멋져라. 그러더니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가만 들어보니 내 사진을 한장 찍어도 되겠냐는 말인 것 같았나. 나를? 내가 쭈뼛거리며 서자, 내 주위로 아이들이 쪼르르 붙어 선다. 양쪽 아이들의 팔짱을 끼고서 사진을 찍었다.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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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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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행복한 시간 되렴, 혼자 아쉬워서 몇 번이나 뒤 돌아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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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에 쳐박혀 책 읽기 좋은 곳(도서관에 사람이 많이 없다), 안녕. 언젠가 책을 꼭 기증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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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 어제 들렀던 카페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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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니 믹스카페에만 있다는 메뉴 중에 하나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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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거품기가 없어서 손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우유 거품을 따로 떠서 커피 위에 얹어 주셨다. 오늘도 커피 맛 좋고, 다른 원두도 마셔보라고 또 커피 한 잔 더. 아 좋다.

카페 안에 한국 여자분이 들어오셨다. 왠지 느껴지는 포오-스가 딱 봐도 장기 여행자의 아우라. 내가 잘하는 거, 먼저 말 걸기.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태국 여행도 이미 여러번일 뿐더라 이 번에도 꽤 긴 여행 중이셨다. 나는 원래 추석 연휴에 갑자기 퇴사를 하게 되면서 10일 정도 일정을 늘렸다고, 내 여행 일정을 말하자 여자분께서 대뜸 자기 같으면 취소하고 일정을 더 늘리겠다고 하셨다. 그럴 땐 무조건 편도 티켓으로 오는거라고.

편도 티켓이라니.
나는 단 한번도 편도 티켓으로 여행을 시작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상상 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편도 티켓이라니. 항상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꽉 채운 여행 계획만을 짰기 때문에 출발 일정보다 더 중요한건 늘 돌아오는 날짜와 시간이었다. 그러고보니 퇴사가 결정되고 비행기 일정을 변경할 때가 생각났다. 사람들이 주위에서 퇴사했으면 좀 긴 여행을 가야지, 마치 공식처럼 권했다. 그렇구나. 이미 계획되어 있는 여행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대체 언제 돌아와야 하는지가 고민이었다. 돌아와야 할 시간이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은 여행은 처음이었다. 이상하다, 설레고 신나기 보다는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결국 조금의 고민 끝에 돌아오는 시간을 정하고 표를 변경했다. 그랬었다. 그때 복잡한 마음에도 편도 티켓은 내 머리 속에 없었다. 돌아오는 시간이 결정되고 나니 편안했다.

일단 한번 가보자, 하고 떠나는. 그러게 그런 여행도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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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만난 여자분이 추천해주신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있었다. 하나도 안 남기고 싹싹. 전에 먹었던 솜땀은 조금 비렸는데 이 콘솜땀은 싹싹 숟가락으로 떠 먹을 만큼 맛이 좋았다. 바싹 익힌 닭고기도 일품, 부슬부슬한 밥도 너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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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는 도중 핸드폰이 꺼져버렸다. 가방을 찾아보니 당연히 있어야 할 충전선이 없었다. 핫. 그랩만 부를 수 있어도 구글맵만 볼 수 있어도 어디든 갈 수 있는데, 핸드폰 하나 꺼졌을 뿐인데 갑자기 생각이 꺼진 듯 멍해졌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썽태우를 잡아 타고 집 근처로 가야겠다 까지만 생각이 미치고, 밖으로 나왔다. 눈 앞에 썽태우를 세워 "치앙마이 유니벌스티" "투엔티 바트?"를 외친 뒤 순조롭게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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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들어가서 좀 쉬다 저녁 먹으러 어딜갈까 하고 있는데, 생각도 못한 낯선 곳에서 다 왔다고 내리라고 하신다. 음. 음...
내 실수였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은 대학 후문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치앙마이 대학으로 가자고 했으니 정문에 와서 내려주신거다. 상상도 못했다. 여기서 다시 후문으로 가자고 말을 하면 될 것을, 아니 후문이 영어로 뭔가요. 핸드폰이 꺼졌으니 저는 후문을 영어로 찾을 수도 없답니다. 일단 내렸다. 돈을 내고 기사님은 떠났다. 모르는 곳에 서 있자니 점점 정신이 돌아왔다. 자 보자. 충전이 된 보조 배터리는 가지고 나왔고, 충전기선을 사면 되는 것 뿐이었다. 나참. 눈 앞의 편의점에 들어가니 당연히 충전선을 팔고 있었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무사히 연결 시키고 달디 단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베어 물었더니 또 금새 세상 만사가 다 편안해졌다. 그러게 나는 원래 이렇게 작은 일에도 잘 당황하고 덜렁대고 그때마다 금방 멘붕이 되는 사람인데. 되려 여행에서 큰 사건이 없다는게 신기하다. 오늘은 다만 긴장이 조금 일찍 풀렸을 뿐.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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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대학 정문에 왔으니 쭉 가로질러 걸어가서 후문으로 가면 되겠다 싶어 정문으로 들어갔다. 관리하시는 분들이 저쪽으로 가리키셔서 그 쪽으로 가보니 관광객들이 100명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객 셔틀 버스를 타는 곳, 그대로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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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대학 정문의 우거진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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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랩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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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차 한잔. 정말이지 이 서점 참 좋았다. 자꾸만 오고 싶은 곳이었다. 오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혹시나 해서 찾고 있었던 책이 있는지 물어봤다. 오늘도 친절한 서점 언니가 지금은 없지만 주문하면 아마 다음 주 월요일 쯤은 들어올거라고 말하는데 아, 다음주 월요일이면 나는 서울. 나도 모르게, 저 내일 떠나요, 쓸쓸하게 말해 버렸다. 그녀도 아- 짧은 탄식. 다음에도 또 가야지. '여긴 제가 치앙마이에서 갔던 곳 중 최고의 장소에요.' 끝내 부끄러워 건내지는 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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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발을 멈추게 하는 힙한 외관의 카페가 보여서 들어갔다. 이런 곳은 지나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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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이렇게 힙한가요, 카페 이름 CKNS이 뭔가 했더니 'Cool Kids Never Sleep'의 약자. 이름에서도 쿨내음이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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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된 공간이었다.

아이스라테를 한 모금 쭉 마시고 아차, 했다. 초반에 몇 번 하고 안하던 실수였는데. 시럽 빼달란 말을 안했다. 안하던 짓, 충전기를 두고 나오지 않나, 시럽 빼달란 소리를 잊어버리지 않나 긴장이 조금 이르게 풀린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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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다른데를 가볼까, 아니면 집에 들어갈까하다가 그냥 집 주변을 좀 더 걷기로 했다. 뭐 특별할 건 없지만 이 동네 참 예뻤다. 그동안 부지런히 동네를 다녔지만, 아직 안 가본 골목이 훨씬 많으니까. 이렇게 모델 같은 깨끗한 길냥이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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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건물도 보기 좋게 바꿔주는 초록이들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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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벽화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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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할 건 없는 동네 풍경이지만, 돌아가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훨씬 더 그리울 것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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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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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하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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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을 제외하면 동네 골목 안쪽에는 아직 가로등이 많이 없어서 해가 지면 금방 어둠이 몰려왔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일단 눈에 보이는 깔끔해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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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특별할 것 없는 한끼였는데, 세상에 저 고기랑 마늘 볶음 왜 이렇게 내 입맛에 꿀인지. 고기 볶음 양이 작은게 흠. 아저씨, 저 고기 양이 왠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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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앞의 야시장 덕분에 늘 북적 북적, 으슥하지 않고 좋았다. 이것도 참 그리울 예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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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군것질로, 교자를 사서 들어갔다. 캐리어를 챙기고 숙소를 한번 쓸고 정리했다.

확인해보니 그제야 와이파이가 고쳐져 있었다. 와이파이 수리 기념으로 마지막 날에야 영화를 한 편 보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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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할 건 없는데 해도 뜨기 전에 눈이 먼저 떠졌다. 결국 이렇게 떠나는 날이 왔구나. 눈꼽만 떼고, 그냥 겉옷만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보니 다행히 수리가 끝났는지 건물 엘레베이터가 작동이 된다. 6층에서 캐리어를 들고 내려가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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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 앞 도로에서 해가 뜨는 걸 좀 봤다. 질리게 본 초록, 그렇지만 질리지 않는다 이건. 내내 참 잘 잤고 잘 쉬었는데 긴장이 미리 풀려버려 어제부터 뭔가 조금 피곤한 것 같다. 아니면 떠나기 아쉬워서 이런 기분인건가. 잘 모르겠다. 아쉬운 건지 아닌지, 더 있고 싶은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치만 출발하기 전부터 이건 알고 있었다. 어떤 여행을 했더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걸. 그냥 나는 또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여름에서 가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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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서 마지막 용과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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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보일 때마다 자주색 용과를 사와서, 내내 잘 먹었다. 접시와 포크 설겆이까지 마치고 택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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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본 창 밖의 풍경이, 눈물나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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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니 서울은 한껏 가을을 지나는 중이었다. 느즈막히 일어나 쇼파랑 한 몸이 되어 있는데 아빠가 집 근처에 새로 카페가 생겼다며 동네 소식을 전해주신다. 딱 20일 자리를 비웠는데 계절이 바뀌고, 없던게 생겨났다.

서른 다섯의 가을이 지나고 나면 서른 다섯의 겨울이 올꺼고, 그리고 나면 서른 여섯의 봄이 될텐데. 그게 뭐가 그리 기다려져서 가을 가을 했을까. '결혼도 하고 아가도 낳고, 회사도 다니는 여자의 서른 다섯은 지금 나의 서른 다섯보다 무거울까 가벼울까' 같이 세상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게 지금의 나라니. 그런 와중에 대책 없이 글을 써서 먹고 살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는게 지금의 나라니. 또 그 와중에 창 밖의 가을이 예쁜 것에 홀딱, 마음 깊이 아 너무 좋다 하고 있는게 지금의 나라니. 나는 아마 내가 상상도 못했던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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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돌아온지 몇 개월이 지났다. 여행 후기를 쓰면서 치앙마이를 다시 그리워하는 동안 서른 다섯의 가을이 지났고 그 사이 또 여행을 하고, 알고 있었던대로 서른 다섯의 겨울과 서른 여섯의 봄을 지나고 있다.

상상도 못한 어른, 그런데 사실 썩 당황스럽지는 않다. 서른 다섯 겨울까지의 나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다. 서른 다섯의 겨울이 지나면 자연히 서른 여섯의 봄이, 또 여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건너가는 시간의 순간들을 내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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