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람들의 재난을 대하는 삶의 자세에 대해
중국을 배경으로, 재난과 연관된 몇 편의 영화 중에서 문득 2편이 떠올랐다.
하나는 2014년작 일생일세(一生一世)이고 다른 하나는 2009년작 호우시절(好雨时节)이다.
두 영화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가 동일인이다.
이 여배우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고 중국에서도 몇몇 유명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여 지명도가 높다. 2014년에는 조우정이라는 대만 출신 연예인(5살 연하)과 결혼을 해서 유명세를 탔다. 많은 중국인들이 이 둘의 결혼에 반대했다고 하는데, 아마 중국을 대표하는 이 고원원이라는 배우가 남자에 비해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중국에서 일어난 두 개의 큰 재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두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고원원은 2014년작 일생일세(一生一世)에서는 어머니를 어렸을 때 발생했던 탕산 대지진(1976년) 사건으로 여의게 된다. 2010년작 호우시절에서는 2008년 발생한 쓰촨성 대지진으로 남편과 사별한 것으로 나온다. 두 영화 모두 여주인공이 어떤 사건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 이후의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는 2001년의 뉴욕이 배경으로 나온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1976년 베이징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줄거리상 이 첫 장면이 현재이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이 2001년으로 돌아오게 되며, 그 회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 영화의 내용이 된다.
1976년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된 허베이성 탕산 지역의 지진이 발생한 년도다.
이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의사라는 직업으로 나오는데, 바로 이 탕산 대지진 구호를 위해 의료지원 파견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고원원의 어머니는 가지 말라는 어린 딸에게 탕산의 아픈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가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후 영화는 몇 년이 지난 1982년 그리고 90년대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대학생이 된 고원원은 홀로 남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미국 콜럼비아 대학의 의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 전에 남자 주인공(사정봉, 谢霆锋)을 만나고(실은 두 사람의 인연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 알게 모르게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과 로맨스가 있었지만 둘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직접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후 영화는 2001년 뉴욕(영화 시작의 첫 장면)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사랑이 결국 이루어질 것처럼 그려지다가 911 테러 (남자 주인공의 사무실이 바로 그 쌍둥이 무역센터에 있었다.)로 인해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는, 슬픔 결말로 끝 맺힌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주인공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 2014년을 보여준다. 여주인공은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남자 주인공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를 사랑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이 영화의 제목인 “一生一世”이라는 말을 남긴다.
일생일세(一生一世)는 한번 살고, 한번 죽는다, 일평생, 한평생이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의미이기도 하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덧없는 그 짧은 삶의 시간으로 자칫 인생의 허무한 단면만 보여줄 것 같은 상황에, 이 여주인공이 던지는 한마디가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주려고 했던 주제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초반의 배경으로 설정된 1976년은 탕산 대지진뿐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던 한 해였다. 그해 1월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라는 정치 지도자가 죽었고, 6월에는 공산당 지도자 조우더(周德)가 사망했다. 그 해 9월에는 중국을 이끌어 오던 지도자 마오쩌둥(毛泽东) 이 죽었다. 중국 정치에서도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24만 명이 당일 지진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사망자가 65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재난 이후 중국은 이곳 피해 지역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외부의 접근을 막았고, 당시 유엔을 비롯한 해외 여러 원조 제안이 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자국민의 민심 동요를 감안해서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 정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와 비밀 유지로 현재까지도 그 피해규모나 복구 과정 등이 정확하게 드러나있지 않다. 서방세계에 알려진 게 재난 발생 후 2년이 지나서였으니, 얼마나 중국 정부가 이 사건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가 좀 더 개방된 이후에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와 영화도 제작되어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처참한 상황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과 그 회복의 과정을 직접적으로 그린 것은 탕산대지진(2010)이라는 영화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대지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었다.
그런데, 탕산 지진이 발생하고 30여 년이 흐른 뒤, 중국을 다시 뒤 흔드는 대지진이 발생한다.
2008년 발생한 리히터 규모 7.9의 지진으로 당시 약 7만 명이 죽고, 다친 사람이 37만 명, 실종자도 1만 8천 명이 발생하는 대재난이 다시 일어 난다. 당시는 이미 중국이 경제, 사회 개방이 많이 되었고 지진이 발생한 쓰촨 성의 성도(城都) 쪽에도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하던 시기라 이 사건은 대외적으로도 많이 알려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긴급 구호 활동을 위해 119 구조대원을 파견하는 등 세계 각국에서의 지원과 구호가 뒤따랐었다.
이 대지진 사건 이후에 당시 중국 지식인들과 언론에서는 2005년 张庆洲에 의해 발간되었던 '탕산 경세록'(唐山警世录)이라는 보고서가 다시 회자되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당시 탕산대지진 직전에 일어났었던 여러 가지 지진에 대한 징후와 정부조직 내부에서 조차 지진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그에 따른 더 큰 피해를 났게 된 사실을 열거하며 다분히 비판과 반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2008년 이 보고서 책자가 다시 회자된 것은 그때 당시의 탕산대지진에 대한 반성이 실제 어떤 부분에서 국가 재난 관리 시스템에 대한 변화와 개선을 주었는지, 그리고 2008년 지진 발생 전후로 어떤 시스템이 작동했는지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민들 관점에서 한 세기에 2번의 대지진 참사를 겪었는데, 여전히 부족했던 사전경보 시스템, 그리고 재난 이후의 즉각적인 구호 체계의 발동에 대한 부족함등에 대한 아쉬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연 재난 자체를 막을 힘이 인간에게는 없으나, 만약 충분히 그러한 재난을 인지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실제 재난 상황에서의 매뉴얼, 체계적인 구호 시스템 등에 대한 정부의 효율적 대처를 논하고 싶었을 것 같다.
어쩌면 현재 우한의 신종 코로나 사태와 2003년의 SARS 사태를 비교하는 것의 데자뷔 같은 것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