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고생1:독서, 뇌가 설계하지 못한 환각

그래서 종이냄새는 계속 유효하다

by simple life

인류의 역사가 우주나 지구의 역사에 견주면 그다지 길진 않지만 그래도 인류의 역사에서 역사 시대, 즉 문자의 역사를 본다면 5,000년 전의 일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여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고 듣는 본능은 있지만,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유전자에 새겨져 있지 않다. 우리 뇌에는 애초에 '독서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텍스트란 자연스러운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생물학적 설계도를 거스르는 지극히 인위적인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독서는 뇌의 기존 회로를 '해킹'하는 행위와 같다. 뇌에는 사물의 모양이나 동물의 발자국, 사람의 얼굴을 식별하기 위해 오랜 시간 진화해 온 영역들이 존재한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하게도 바로 이 시각 처리 영역을 강제로 동원한다.


아이들이 처음 글자를 대하는 방식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아이들이 처음 글자를 배울 때, 아이들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으로 인식한다. 내 아이 역시 '크리스피 크림(Krispy Kreme)'의 로고를 보고는 망설임 없이 "해피홈"이라 읽곤 했다. 아마도 마케팅 전문가들은 뇌가 글자를 그림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간파하고, 해피홈의 글자 모양을 크리스피 크림에 적용해서 글자를 디자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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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입장에서 독서는 엄청난 적응이자 동시에 왜곡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시각 피질을 속여 검은 선과 점의 집합을 '의미'로 변환하도록 뇌를 혹사시킨다. 독서란 존재하지 않는 자극을 마치 존재하는 정보처럼 처리하기 위해, 뇌의 시각 회로를 재배선(Recycling)하는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책을 읽고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사실 판타지에 가깝다. 애초에 뇌에는 텍스트를 직접 이해할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이해'라는 감각은, 뇌가 불완전한 시각 신호인 글자를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투사하여 빈틈을 메운 결과물일 뿐이다. 아이가 낯선 '크리스피 크림'이라는 글자를 익숙한 '해피홈'의 이미지로 치환했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텍스트 속에서 이해했다 혹은 감동받았다라고 느끼는 것은 텍스트의 논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는 앙상한 뼈대에 불과하고, 뇌가 필사적으로 뼈대에 살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은 읽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감동과 해석을 낳으며, 텍스트는 영원히 미완의 상태로 남는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은 독서를 동경하게 되는 거 같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읽는 것은 원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읽으려면 우리는 애초에 불가능에 끝없이 도전하는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이므로 고통을 수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은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희열로 치환된다.


고통이 희열과 맞닿아 있다는 사도마조히즘의 역설처럼, 독서 또한 그러한 메커니즘이 가장 지적이고 치열하게 발현된 형태다. 없는 기관을 억지로 가동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머릿속에 축조해내는 행위. 이 불가능한 과업을 수행하며 느끼는 뇌의 부하가 희열로 바뀌는 순간, 독서는 인간 실존의 증명이 된다.


"텍스트는 판타지"이고, 텍스트의 정점에 있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판타지에 접속하는 것이다.


독서는 이런의미에서 가장 안전하고 권장할만한 환각제인 것이고, 오직 인간에게만 허락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종이 냄새는 아직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