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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경일 Oct 28. 2017

고경일의 풍경 내비

잊고 살았던 재일동포 이야기, 이거 실화냐?

무서운 것은 땅이 갈라지고 흔들리는 ‘지진’만이 아닙니다. 진실을 뒤집는 ‘역사의 지진’은 재앙을 예측할 수 있고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인재(人災)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비참합니다. 오사카의 이쿠노쿠구에 있는 코리아 타운은 재일 동포의 마음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느닷없이 2010년부터 불기 시작한 레이시스트의  헤이트 스피치(증오발언 hate speech)와 혐오 시위가 코리아 타운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전까지는!

인종차별 시위대들은  ‘좋은 한국인도, 나쁜 한국인도 모두 죽여라’, ‘당장 목매달아라, 조센진’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들고 거리를 활보했을 뿐만 아니라  츠루하시(鶴橋) 역 앞에서는 한 여중생의 ‘남경 대학살이 아니라 츠루하시 대학살을 실행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재생산까지 했습니다. 특정 민족을 ‘죽인다’고 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대량 학살처럼 어떤 집단의 멸종을 목적으로 한 대량 살육행위)를 뜻하는 용어가 난무하는 일본의 21세기는 문명국가이자 자기 스스로 아시아의 선진국임을 내세우는 나라로서는 최악의 인재입니다.

츠루하시 오우하시 (魚八)상점가 에는 한국보다 더 한국 같은 풍경과 정이 남아 있습니다.냉혹한 이국 땅에서 배타주의와 차별 속에 서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다다미 넉장 반('이보다 더 작고 싸게 구할 수 없는 방'이란 뜻을 가진 관용어로도 쓰이며, 우리나라로 치면 고시원이나 쪽방 쯤 되는 공간을 말한다. 약2.25평 정도의 방)마련한 것은 실 낯처럼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잡은 행위였다. 친 인척도 없었고 아버지의 친구나 펜팔 친구조차 없이 단신으로 건너와 일본어학교에 등록하고 방을 마련한 것이 1994년이었습니다. 이마 자토(今里)와 츠루하시 그리고 모모 다니(桃谷)로 이어지는 이쿠노쿠 구는 코리아 타운이 형성된 재일조선인 1세대들의 작은 소망을 실현하는 텃밭이었습니다. 1910년 강제병합을 전후로 수많은 민초들이 먹을 것을 찾아, 일거리를 찾아 이국땅까지 노예처럼 팔려 오고 떠밀려 와, 10년 후에는 재일조선인이 약 3만 명으로 이르렀습니다. 1930년대까지 꾸준히 늘어  오사카부의 한국인(재일 조선인)은 9만 6943명으로 집계되었고, 그중에서  제주 출신이 가장 많았습니다. 1922년에 오사카와 제주를 오가는 ‘군대환(君が代丸 기미가요마루,1869년 네덜란드에서 제작한 669톤급 선박) ’이 취항할 정도였고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주의 생필품은 오사카에서 공급한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많은물건들이 제주도로 밀수 되었습니다. 1948년 4.3 민중항쟁의 시작도 오사카에서 들어가는 밀수품을 육지에서 온 경찰관들과 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 사람들이 갈취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마 자토에서는 고운 한복을 입고 웃음을 하는 누나들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유흥업소에 남성들은 건설현장이나 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했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군비 경쟁과 사상 대립을 통해 권력자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사이 일반 시민들은 먹고사는 문제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문제를 위해 일본까지 와야  했습니다. 츠루하시 역 굴다리를 중심으로 야키니쿠(燒き肉:불고기) 집의 고기구이는 지나온 조선사람의 흔적을 확인하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필자가 유학 중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츠루하시의 불고기 집 주방에는 사라 아라이(さらあらい:접시닦이)를 하는 제주도 출신의 아줌마들이 10여 명 함께 일했습니다. 어느 날 주방에 아줌마들이 한 명도 안 나온 날이 있었습니다. 주방장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출입국관리소에서 불법취업자 단속이 나와서 아줌마들을 전부 잡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뉴스에 굴비처럼 줄줄이 호송차에 실려가는 제주도 아줌마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어쩌다가 약 30여 년의 군부독재 권력의 땅에 태어나 아무런 보호도 못 받고, 먹고살기 위해 자기 발로 남의 나라에 건너와 쫓겨 다녀야 하는 현실이 슬펐습니다.  한반도의 힘없는 민초들은 5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현재나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한 없이 우울했습니다. 코리아타운의 불고기 집에서 나오는  연기에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기구한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에게 던지는 간절하고도 절절한 한숨이 섞인 눈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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