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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May 17. 2023

오후의 인터뷰 1화: 휘리

생명력 넘치는 세계를 유영하듯 그리는 휘리 작가 인터뷰

2021년 9월

일상비일상의틈 앱에서 진행했던 <오후의 인터뷰>를 옮깁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 그대로 자기에게 의미 있는 일을 가꾸어 나가는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갈지 궁금했다. 그것이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하루의 꾸준함을 쌓아가는 사람의 생각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지 살짝 엿보았다.


‘휘리’라는 이름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이름에 관해 얽힌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나요?

필명으로 종종 오해를 받지만, 본명이에요. ‘아름다울 휘徽, 잉어 리鯉’로 어머니의 잉어 태몽에서 비롯되었어요. 이름처럼 저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붓 터치와 푸름의 절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그림은 표현의 영역이라 어떤 계기에서부터 그림의 형태가 시작되진 않아요. 전반적인 저의 관심사를 빈 종이에 계속 구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스타일로 그리게 되었어요. 그림은 평면적이고 항상 정지되어 있잖아요. 자연물을 그리면서 생명이 역동하는 움직임을 평면에 구현하고 싶었어요. 그 세계관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항상 염두하고 그리고 있어요.

저는 제 그림이 일상과 판타지의 경계 정도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허락 없는 외출》 그릴 때도 그랬어요. 평소에 보던 것을 확장하거나 축소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이 어우러진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언리미티드 에디션 라이브드로잉 (2019) ⓒ 휘리


다양한 협업을 해오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을까요?

앨범 그림을 그리거나, 라이브 드로잉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김세연 작가님과 함께 벽에 큰 그림을 그린 일도 좋았고, 국악 크로스오버 듀오인 카운드업 무대와 함께했던 적도 있었어요. 관객이 있는 작업은 처음이라 설렘과 긴장 속에서 진행했어요. 그림은 완성되어도 박수받을 일이 없잖아요. 곡이 끝나고 라이브 드로잉도 함께 끝났는데, 관람객들이 손뼉을 쳐주시는 거예요. 새롭고, 마치 저의 영역이 확장되는 경험이었어요. 다시 경험해보고 싶네요.


직업으로서 아티스트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발달한 부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재미가 있어요. 어떤 일이든 좋은 것과 괴로움이 함께 가길 마련인데, 아무래도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괴로움의 폭이 가장 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번씩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것도 좋고,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자체가 작업이라는 것도 의미가 커요. 


휘리 작가의 작업실 ⓒ이민혜


작가로서 세계관을 말씀해주신다면?

작가로서의 세계관은 삶을 긍정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이나 위로 같은 긍정적인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때로 너무 습관적이어서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게다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기 쉽고요. 그럴수록 삶의 가치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걸 저의 방식과 감각으로 이야기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타인에게 큰 의미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작업하면서 자신을 설득하며 마음에 와닿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림 이외에도 다양한 것을 기록하신다고 알고 있어요. 자신에게 있어 기록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기록의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다이어리예요. 18살부터 한 번도 안 빠지고 썼어요. 주로 내일 뭐 할지를 기록하는 일정 관리 용도로 사용하죠. 또 하나는 블로그예요. 2008년부터 기록해왔어요. 종종 인생의 허탈함을 모래성에 비유하잖아요. 누군가 그랬어요. 모래성은 무너져도, 모래성을 만들던 기억은 남는 거라고요. 저에게는 블로그가 그런 의미예요. 저의 중요한 기억을 정리해서 남겨두고, 2~3년 뒤에 보면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경험을 몇 번 해보고 나면 기록을 자연스럽게 하게 돼요.


요즘 틈나는 시간에 뭘 하시나요?

한 번 걸으면 많이 걷는 편이에요. 10km 이하는 별로 걸은 느낌이 안나요. 매일 걷는 건 아니지만, 외출 후에 집에 돌아올 때 거리를 가늠해보고, 15~20km 정도 걷는 걸 목표로 하고 걸어요. 걸으면서 뭔가를 본다는 환기도 있지만,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전해오는 에너지가 좋아요. 머리가 안 돌아가거나 기운이 없을수록 나가야 하는 것 같아요. 움직이고 나면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 임효진


8월 말, 출간한 『곁에 있어』는 어떤 책인지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살다 보면 혼자가 즐거운 순간도 있고, 혼자 있는 게 어려운 순간도 있어요. 그런데 ‘혼자 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정말 혼자 있는 걸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책이에요. 저는 광활한 풍경에 홀로 서 있는 무언가를 계속 그려왔는데요, 평소에 그리던 ‘홀로’의 모습들을 옆으로 이어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페이지마다 혼자 있지만, 책을 끝까지 펼치면 기다란 풍경 속에 모두 함께 있는 모습이 되는 아코디언 북이에요.

처음으로 혼자 여행 갔던 날이 떠올랐어요. 친구나 가족과 갈 때만큼이나 즐거웠고, 또 홀로 잘 버텨냈다는 뿌듯함이 들었지요. 그런데 돌아와 생각해보니, 정말로 혼자 있었던 시간은 많지 않더라고요. 찍은 사진을 친구에게 보내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길을 자세히 알려주던 어떤 사람들이 있었으며,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 종종 울리는 전화들도 있었어요.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마저, 곁에 있는 존재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요.

이런 감상을 저의 감각으로 풀어낸 책이 『곁에 있어』예요. 다 펼치면 3m가 훌쩍 넘는 긴 책입니다. 디자이너의 제안으로 표지에 그림을 쓰지 않고 색지로 마감했는데, 덕분에 푸른 종이를 펼치면 그림이 후루룩 쏟아지는 근사한 책으로 완성되었어요.


“커다란 풍경 속에 오도카니 있는 무언가를 줄곧 그려왔다. 숲속에서 이는 바람을 따르거나 홀로 버티는 모습들이었다. 그것을 모아 하나씩 곁에 앉혀본다. 어려운 혼자도, 즐거운 혼자도, 펼쳐보니 다 함께 있는 풍경이었다.” -『곁에 있어』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 소개> 휘리

독립출판물 『천천히 부는 바람』, 『잠을 위한 여정』, 『연필로 그리는 초록』, 『저녁』과 그림 에세이 『위로의 정원, 숨』과 『허락 없는 외출』에 이어, 2021년 8월 『곁에 있어』를 출간했다. 


인터뷰_오후

사진_이민혜(작업실), 임효진(도서『곁에 있어』)

그림_휘리 

https://www.instagram.com/wheeleepainting/





오후의 인터뷰 | 아티스트의 날 것의 생각을 공유합니다. 아티스트라는 직업적 특성을 보유하고, 작품에 뚜렷한 경향성을 나타내며 사회적 자아실현을 실천하는 예술가의 고뇌와 삶의 방향을 대화를 통해 엿보고, 소개하는 인터뷰입니다. 이 작은 대담이 대중의 작가 발견에 요만큼 기여하고, 다음 신인 아티스트의 자아 창조에 스리슬쩍 참고되길 바라는 인터뷰어의 마음이 있습니다. 오후의 인터뷰는 아티스트를 넓은 범위에서 칭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을 아티스트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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