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민희 Oct 18. 2018

#5. 물결

‘을지로 감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핑크빛 공간.

*겨울 막바지에 제작한 독립 출판물 '을지로 야옹이'를 매주 브런치에 소개합니다


#5. 물결

‘을지로 감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핑크빛 공간.




“이런 곳에 그런 핑크핑크한 카페가 왜 있어.”

퇴근하고 만난 십년지기들과

광장시장 육회를 두 접시나 비운 시간이었기에

을지로는 어둡고 조용했다.


“아냐 요새 을지로가 엄청 힙해졌다니까.”

친구의 합리적 의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도 앱을 켠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돌리며 대답했다.


낮은 건물들 사이에 유난히 허름한 건물 꼭대기 층에서

분홍색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저기 맨 위에 분홍색 창문 보여?”

“어디?”

“쩌어기! 일단 가자”



지도 앱 속 주소가 적힌 건물 앞에 섰다.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폭과 수직에 가까운 기울기를 가진 계단.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입구였다.

간판은 당연히 없었다.



“여기 맞아? 무서워”

영화 ‘아저씨’에 나올 것 같은 음침한 사무실을 지나 꼭대기 층까지 헉헉대면서 올라갔다.

꾸깃한 종이에 얇은 두께로 적힌 두 글자, ‘물결’을 따라.차가운 회색 문을 열자 사방이 분홍색인 작은 공간이 나왔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한 커플이 이미 앉아 있었다.


정말~ 물결이~ 적혀~ 있는~ 물결~


밖으로 새어 나왔던 핑크빛은

‘잠시 동안 우리는 물결 속에서’라고 적힌 네온사인 때문이었다.


우주선 모양의 미러볼에서 잔잔한 불빛이 돌았고,

한켠에는 주인 언니의 작업 공간이 보였다.


흰 모래가 깔린 테이블과 돌고래 모양 오프너는 물결과 어울렸지만,

나머지 아이템들은 딱히 큰 관련 없어 보였다.

그냥 주인 언니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은 것 같았다.


그런 점이 되려 더 매력적이었다.

주인 언니의 방에 놀러 간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얀 모래가 깔린 이 자리를 제일 좋아한다.


최근 을지로에 ‘을지로 감성(뭐라고 딱 정의하기 힘들다)’의 카페와 식당, 술집이 많이 생기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어딘가 모르게 너무나도 번듯한 느낌이 든다.

을지로 특유의 어설픈 분위기를 열심히 흉내 낸 느낌이랄까.


그런 가게들을 ‘손 글씨를 본떠 제작한 폰트’라고 본다면, 물결은 진짜 ‘손 글씨’다.

그래서 을지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힙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난 항상 물결을 말한다.


전자레인지로 만들 수 있는 음식만 팔아서 딱히 맛있는 메뉴도 없고, 세련되게 꾸며진 느낌도 아니다.

그래도 물결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을지로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이 세 번 바뀐 후 찾아간 '물결'에 짜파게티 메뉴가 생겼다. 감격!


다섯 달 만에 만난 우리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위의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병맥주를 나눠 마셨다.


“몽골 가자고?”

“응! 너무 좋다! 별 보고 싶어.”

“너네 휴가 언제 낼 수 있어?

 아니다. 몽골은 언제 여행하기 좋대?”

“다들 달력 켜봐!”

여행을 가잔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세 명의 눈이 반짝이며 목소리를 키웠다.

스무 살 우리가 동아리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회색빛 서울에서 직장인 노릇을 하면서도 대학 시절의 핑크빛 감성은 그대로 가진 우리 또한 물결 같았다.

잠시 동안 우리는 물결 속에서 스무 살이 되었다.




물결

을지로3가역 10번 출구로 나와

꼭대기 층 창문이 핑크로 빛나는 건물의 401호


매거진의 이전글 #4. 장수보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