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기생충>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기태: ...부잔데 착해.
충숙: 부잔데 착해가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야.
기우: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이사는 꼭 햇볕 좋은 날 들어가려구요.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절친인 민혁(박서준)이 산수경석를 건네주며 일자리를 제안한 날, 기우(최우식)는 이 부잣집 물건을 '상징'이라 믿으며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거짓 이력을 가진 과외 교사지만 대학을 들어가서 그 거짓을 진실로 바꾸겠다는 것.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거짓은 계속 거짓을 낳는다. 미술 교사로 동생 기정(박소담)을 소개하고, 운전수로 아버지 기태(송강호)가 고용되고, 가정부로 어머니 충숙(장혜진)이 들어온다. 취업 사기가 완결되고 속아넘어간 박사장 가족이 집을 비우자 김씨네 가족은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집에서 햇빛과 여유를 만끽한다. 어두운 불빛, 불안한 무선 와이파이, 취객의 노상방뇨, 소독차의 가스 걱정따위는 없는 부자집. 노력으로 쟁취한 그 망중한 속에서, 기우는 박사장의 딸과 결혼해서 그 집을 차지하는 꿈을 꾼다. 기우는 김씨네 가족 중에 가장 현실에 취약하다. 엄마는 자신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자기네 분수를 잃지 않으며, 기정은 현재에 집중할뿐 미래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이들의 성격은 산수경석을 처음 접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 여러번 망해 더이상 계획을 세우지 않는 아버지는 사소한 성공에도 감사해하며 낙관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이들에게 사기 게임은 너무나 쉽다. 성공의 팔할은 잘 속아 넘어가는 사모님 연교(조여정) 덕분이다. <기생충>은 여기까지 <오션스 일레븐>이나 <미션 임파서블>같은 케이퍼(사기/도둑질) 영화의 공식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변주한다.
김씨네 가족의 희망과 낙관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전 가정부 문광이 오랫동안 이 집의 지하에서 기생하듯 살고 있었던 남편 때문에 불시에 방문하면서 이들의 사기가 발칵날 위기에 처한다. 전직 운동선수 충숙의 뛰어난 반사신경과 가족의 팀워크로 절박한 순간을 모면하지만, 의도치 않게 그들은 착하다고 믿었던 부자들이 '선' 밖의 사람들에 대한 냄새를 혐오하는 대화를 엿듣게 된다. 김씨네 가장 기태는 그 비웃음의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무시당하는 대상이다.
비가 가차없이 쏟아지던 밤. 박사장네 가족은 캠핑을 취소하고 채끝살 짜파구리를 먹으며 정신없는 아들 때문에 투덜대지만, 같은 시각 더 낮은 지역의 사람들은 홍수에 집이 수몰되어 대피를 하는 대참사를 겪는다. 수해민들이 체육관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을 때, 박사장네는 맑게 갠 하늘에 행복해하며 바로 생일 파티를 기획한다. 이 때 기생의 상황이 역전된다. 절망의 순간에 절망조차 하지 못하고 부름에 응해야 하는 기우네 가족에게 박사장네가 오히려 기생하는 상황이다. 계획의 건축가로서 통제력을 잃은 기우는 다혜에게 여기에 잘 어울리냐고 묻는다. 급기야는 계획이 망가지는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 행운의 돌 산수경석을 불운을 제거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만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다시 실패하고 지상으로 올라온 근세는 파티의 한복판에서 기태 가족에게 반격을 시작한다.
갑작스런 근세의 습격에 당황한 기태는 자신의 자식과 고용주의 자식을 지켜야 하는 혼란스런 상황에서 당황해하다 박사장의 모욕적인 제스처에 버튼이 눌려 그에게 공격을 가한다. 갑자기 등장한 침입자들에게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박령 수준의 기생인이 그 침입자들과 전쟁을 벌이는 과정이 숙주에게까지 타격을 입히면서 영화는 클라이막스에 다다른다. 아메리컨 인디언 추장의 장신구를 동시에 쓰고 있던 박사장과 기태는 갑작스런 공격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 변하고,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있는 기태는 부족(인디언 헤어피스를 쓰고 있으므로!)의 위기와 고용주의 부름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다. 가장이 균형을 잃고 돈줄을 공격하는 순간 기태는 이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는 셈이 된다. 피자 박스 아르바이트 장면을 떠올려보자. 네 개당 한 개꼴의 불량률. 비난의 말과 함께 기태의 표정이 잡힌다. 완벽하게 설계된 사기에서 맡은 바 역할을 못하고 '선'을 넘었던 사람. 또 다시 네 명 중 하나의 불량품. 동시에 기태의 무계획의 철학마저 무너지고 만다. 박사장을 찌르는 장면에서 혼란과 죄책감과 분노와 자기연민 등등을 감정을 담아내는 송강호의 표정 연기는 거의 완벽하다. 송강호 연기의 무게감은 영화의 좌표를 기우에서 기태로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아들이 문을 열었지만 누구보다 상처를 입고 슬픈 처지가 되는 사람은 가장 기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기생충>의 가부장적 한계와 캐릭터 균형 문제가 발생한다)
이 부족 간의 전쟁이 끝나자 하층의 고용인이었던 기태는 그 계급에서도 밀려나 근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세상에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유령같은 존재로 변신한다.(그러므로 다송이의 유령을 봤다는 증언은 직접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아들 기우는 언젠가 그 집을 사서 아버지를 지하에서 구출하리라 결심하지만 그건 또다른 백일몽에 불과하다. 집안을 다시 세우려던 기우의 계획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실패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겐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워킹 클래스로 남아있던 의지조차 사라지면서 최하층민으로 살아갈 미래밖에 안 보인다.
부잣집에 들어가 부자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다. 기우는 기태가 가지고 있었던 일말의 낙관조차 현실적으로 품지 못한다. 가난한 아버지는 유령이 되었고 가난한 아들은 꿈대신 망상을 품는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 '조커'처럼 웃게된 기우가 끌고 가는 마지막 장면들은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어 더 슬프게 다가온다. 중반부터 호러/스릴러로 심장을 뛰게 만들더니 갑자기 현자타임으로 결자해지하며 모두의 발목에 산수경석보다 무거운 현실의 추를 메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이 계급 우화가 전세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이유는 어떤 감독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지금 젊은 세대의 빈한함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99퍼센트가 1퍼센트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착취의 세상으로 현재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면 <기생충>의 서사에 반하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월스트리트 시위가 유명무실하게 막을 내린 뒤, 버니 샌더스가 표류하던 젊은이들을 결집시킨 오늘의 미국엔 현실의 구조적 불평등을 날카롭게 비춰주는 이야기를 찾기 힘들다. 2019년 <조커>와 <기생충>이 세상에 나온 것도, 이 영화들이 지지를 받은 것도 어쩌면 그런 암울한 현실의 상징같은 것이다.
기우의 '상징적'이라는 말과 기태의 '시의적절'이란 말은 <기생충>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기생충>은 직설적인 영화지만 어떤 대사도 직설적으로 분노나 비판을 표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시의에 맞춰 상징 게임처럼 해석되고 평가된다.(등장인물의 눈을 가린 포스터마저 이 컨셉에 부합한다) <설국열차>와 <옥자>는 분명한 적과 분명한 비판 지점이 있었고 너무 쉬워서 비교적 시시했던 영화들이었다. <기생충>은 그런 장르적 장치의 압박에서 벗어난 봉준호가 장르를 예술처럼 구사함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렇기에 <기생충>의 상징과 시의적절함이 영화적으로도 영구불변한지 깨닫기 위해서는 5년 뒤 10년 뒤에 이 영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때가 어서 오기를 너무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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