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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보리 Nov 23. 2021

아직도 뭔지 모르는 감정

오후에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정리하면서 유튜브로 음악 영상을 틀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임이 분명한 한 도시의 거리를 보여주며 잔잔한 캐롤이 흘러나왔다. 다음 결제일에 빠져나갈 카드값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계좌의 잔액을 확인하고... 하다가 문득 눈을 들어 화면을 보았다. 약 1분 정도의 영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는데, 아치형 장식을 가진 건물들이 늘어선 사거리를 손톱만 한 자동차가 바쁘게 지나다니고, 인도에는 둘 혹은 셋 혹은 혼자 걷고 있는 행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밤의 풍경이라 주홍빛 조명이 반짝거리고 바닥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처음에는 이 영상이 어디서 끝이 나서 다시 시작이 되는지 체크해보려고 눈에 띄는 크기의 트럭 뒷모습을 유심히 뒤쫓았다. 화면이 약간 어긋나는 듯싶더니 다시 반복되는 영상. 방금 전에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아 좌회전해 천천히 달려가 화면 위쪽에서 다음 신호를 기다리던 하얀 트럭은 또다시 화면 왼쪽 밑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인도를 걷는 한 커플을 지켜보았다. 서로의 허리를 감싸고 눈길 위를 다정하게 걸어가는 연인과 그들을 지나쳐 가는 다른 사람들. 그들도 화면이 어긋나는 순간 다시 처음의 그 자리에 나타나 또다시 서로의 허리를 감싼 채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누가 운전하는지도 모르는 차. 차라리 그 흰색 트럭이 어딘가에 멈춰 주차를 하고 운전자가 내려서 트럭의 짐칸에서 무언가를 내리고 누군가에게 영수증을 받는 모습을 본다면, 혹은 허리를 감싸고 걸어가는 다정한 연인이 끝내는 횡단보도 너머로 흐릿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면 이런 이상한 애수의 감정은 들지 않았을까? 분명 어딘가에는 실재하고 있을 존재들이 작은 화면 안에 갇혀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저곳은 내가 영원히 닿지 못하는 세계의 순간이라는 인식을 심연에서부터 끌어올린다. 가질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영원히 지켜볼 수 있는 반복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준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또 있을까? 당장 유튜브 채널에 이 영상에 찍힌 도시가 어디냐고 문의하고 답을 받으면 항공권을 예매해 그곳으로 날아가 흰색 트럭이 좌회전하던 사거리나 연인이 걷던 인도 위에 내 몸을 서게 해야 안도감을 느낄 것 같은 이런 감정.


이것은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영화 안의 베로니카도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존재, 또 다른 베로니카에게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이건 정녕, 내가 닿을 수 없는 순간에 대한 애수일까?




#아직도뭔지모르는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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