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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i were there May 04. 2022

사회적 말하기의 어려움

[05]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 - 서울 쥐 편

[편집자 주]

"서울 쥐와 하동 쥐 이야기"는 서울 쥐와 하동 쥐의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서울 쥐와 하동 쥐는 함께 지역을 위한 연구를 하다가 만났습니다. 지금은 서울 쥐는 여전히 서울에서 동일한 일을 하고있는 반면, 하동 쥐는 지역 현장에서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둘의 푸념들이 여러 청년(혹은 중년)들에게 조그마한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적어봅니다.

이번에 싣는 5번째 글은 서울 쥐의 이야기입니다. 부디 즐감하시길~

우리 편지들은 본 브런치와 함께 하동 쥐가 운영하는 경쟁사 블로그에도 공동 게시될 예정입니다.


 


네 질문에 답이 너무 늦어져 버렸네. 지난 글에서는 코로나19 핑계로 내 아픔을 피력하느라, 그 후로는 일 핑계로 손이 게을러져서...눈은 바쁜데 손이 게으른 건지, 이 편지가 우선순위에서 밀린 건지 잘 모르겠다. 내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우선순위가 밀릴 리는 없으니 아마도 이건 직장인의 애환에서 파생된 게으름 정도라고 정의해보자.


응. 맞아. 미안하단 말을 하기 싫어서 주저리 주저리하고 있어. 


아무튼 네가 네 첫 번째 글에서 던져 준 질문 "누군가가 나를 비난할 줄 알면서도 (타인이 싫어할) 목소리를 내는 나"에 대해 이야길 해보고자 해. 사실 이러한 고민에 대해서는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에 혼자 서랍 속에 끄적여 놓은 짧은 글이 있어. 스스로도 마음이 쓰였는지 오래전에 관련 글을 일기처럼 적어놨더라고. 그 글을 조심스레 꺼내어 네 질문에 답해볼게.


물론 남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 나의 행동은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리지. 응당 그렇겠지. 너처럼 그런 소리도 좋아하고 날 아껴주는 이가 있는 반면, 대부분은 날 견디지 못하고 반목의 관계로 돌입해. 그런 상황에서 난 우리 조직을 아니 조금 더 확장해서 사회 자체를 이렇게 정의했었어.


말하기 싫어지는 사회


여러 발언을 하면서 '내가 이상해'라고 생각하면 모든 질문들에(어쩌면 사건들에) 답이 될 수 없었어. 난 항상 이런 생각을 해. 실제 내 말이 혹은 내가 이상한 것도 아닌데 다들 왜 이럴까.


너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타인이 싫어하는 말들을 달고 사는)나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의 '모습'을 강요당해왔어.(어쩌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럴지도)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명확히 설명해주진 못했어. 그저 물 같은 것일까 생각했었어. 이 사람에겐 '이 모습' 또는 '이 모양', 저 사람에겐 '저 모습' 또는 '저 모양'....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같이 어떤 '모습'을 강요한다는 거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했어. 다들 다른 '모습'을 요구하고 있지만, '모습' 자체를 강요하는 것은 동일했어.


난 고민에 빠졌지. 말의 '모습'이란 것에 평균적인 무언가가 있는 걸까? 하고 말야.


그럼 나는 말의 '모습'을 바꿔보려고 한 적이 없느냐? 물론 아니지. 엄청나게 고민하고 도전한 적도 있지.(어쩌면 지금은 바꾼 말의 '모습'이 안착해서 문제가 잘 안 생기는 걸지도) 내가 쓰는 말을 숨기고, 사람들의 말을 먼저 듣고, 가장 무난한 단어들로 응수하는 불편을 감수하는 거지.(누군가는 이걸 사회화라고도 부르더군)

처음에는 나름 쓸만했어. 사회적 관계라는 어떤 것이 잘 형성되어 가는 듯했지. 하지만 바꾼(어쩌면 바꾼 척한) 나도 그렇고 듣는 이들도 그렇고, 나아가 당해보지 않은 너도 그렇고, 모두가 인지하겠지만 이건 정말 구린거라는 생각이 들어.


철저하게 내 중심적으로 느낀 감정은 내가 '사라진다'는 것이었어. 


굳이 무난한 단어들을 고르고 고르지 않아도, 내가 갖고 있는 어떤 감수성들이, 어쩌면 분노가, 어쩌면 옳음, 어쩌면 틀림이 사라질 리는 없는데, 사회적 관계, 친밀감, 유대, 라포 어쩌고 저쩌고들 때문에 대화가 왜곡이 되고 있었어.


즉, 이미 누군가들에게 강요당하지 않아도 나는 물론 개개인은 충분히 사회적인 말하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맞춤형 '모습'까지 강요당한다는 거지. 예를 들어, 나는 이미 대화에 앞서 누군가를 비하하지 않고, 차별의 감정을 담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려 하는데, 그 저의는 보이지 않고 말의 음량, 속도, 비언어적 태도 등에 따라 왜곡이 되는 거지. 사실 타인을 부정하는 마음만 담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적인데...


근데도 사람들이 뭘 더 바라는걸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 항상 사람들은 "너는 말투가 벌써 화가 나 있다"고들 하는데 내가 화 안 났다고 구두로 말을 해도 아니라고 부정하며 말투가 화가 났다고 내가 화가 났다고 하는 거지. 어쩌면 '실제'보다 '말'이 우선하며 모든 걸 왜곡하는 거지. 이런...


심지어 혹자들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는다고 나를 규탄하지. 그런데 너도 경험했겠지만 이런 경우는 상당수가 앞에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상황이고 이런 대화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단절을 단행해야 할 필요가 있어. 사실 말의 총량을 종합해서 분석해보면 이 사람의 의도는 한 문장 정도인데, 어마무시한 부사절과 형용사들을 가지고 와서 말의 '모습'을 갖추려 할 뿐, '대화'는 없는 상황에 도달하는 거지. 그때도 내가 강요받은 말의 '모습' 아니 어쩌면 대화의 '모습'은 개입은 안 된다였어. 솔직히 개인적으로 말하면 내 시간이 낭비되고 내 감정은 전할 기회조차 없었지만....난 이상하게 계속 규탄의 대상이 되어갔지...


이럴 때 난 '난 네 요구대로 사회적 말하기를 노력하는데, 너는 왜 안 하니?'라고 속으로 짜증을 내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더 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며 사람들과 접촉을(어쩌면 대화를) 더 늘리면 더 최악으로 돌입했어. 어차피 좁혀지지 않는 틈, 합의되지 않는 모습이 있는 거지. 공자가 실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내 고민을 들은 누군가가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줬었어.



제자와 길을 걷는 공자 앞에 길 중간에서 대변을 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공자는 제자와 길 가장자리로 비켜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 가장자리에서 대변을 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랬더니 공자가 그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황당한 제자가 아까 길 중간에서 대변을 보던 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왜 가장자리에서 보는 이에게는 불같이 화를 냈는지 물었다.


공자가 말하길, 길 중간에서 대변을 보던 이는 뭔 말을 해도 애초에 가망이 없는 이라서...(풋)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설득(어쩌면 위로)이 됐었어. 당시(어쩌면 요즘도) 나에게 자꾸 눈앞에 있는 이들이 길 중간에 대변을 보는 이들로 보였어. (아!!!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그 대변이 입으로 나온다는 거 정도?)


어느 정도 포기(?)한 상황에서 편지를 쓰다 보니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회적 말하기 혹은 사회적 대화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 다시 인지하게 되네. 다 쓰고 보니 '사회적'이란 단어를 가져다 쓰기도 뭔가 안타까운 마음이고 글이 되어버렸네.


내 현 상황은 이제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된 이들에겐 나의 있는 그대로의 행동과 말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상기 공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며 생활하고 있어. 그러다 보니 조금씩 사고가, 충돌이 줄어드는 걸지도...


씁쓸하네. 이건 상황의 씁쓸함도 있지만 네 질문 자체가 씁쓸한 걸 거야.(여전히 모든 책임을 너에게 전가하고 있음)


희한하게 조금의 한가함 속에선 네가 있는 곳에 쉬이 가지 못하다가, 바빠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그곳이 그립고 아련해진다. 어떨 땐 네가 출사 나가 찍은 사진들로 그곳의 변화를 알려주는 그림 편지도 좀 쓰고 그래보렴. 요구하고 보니 네게 난 글의 '모습'을 강요하는 모양새구나. 스스로도 구림을 입증하며 글을 줄인다.


부디 건강하고 재밌자.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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