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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Aug 30. 2021

야생 탐험대 (2) 수난시대

포토에세이 zoo is noT enOUGH  #10 에토샤


수난시대 難時代: 물로 인해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하는 기간이나 시간


계곡만 한 물길이 도로를 막아섰다. 내리막길이 오르막으로 바뀌는 움푹한 지점을 그늘이 음흉하게 드리웠다. 음지에 고인 빗물이 전혀 마르지 않은 거였다. 지금까지는 웬만한 연못 크기의 웅덩이는 힘도 안 쓰고 지나왔는데 이건 헉 소리가 절로 났다. 길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지도를 따라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지만, 반나절이나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면 이곳이 유일했다.


"엔진 침수되면 큰일인데.."

"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봤는데 이 정도 물을 건널 때는 엑셀만 계속 밟으면 된대."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저만한 깊이는 배기구에서 가스가 계속 뿜어 나오게만 하고 지나가면 된다더라고."


그랬다. 다큐에서 주워들은 풍월에 따르면 적당한 수심에서는 엔진보다 배기구로 물이 역류해 들어오는 걸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물에 잠겼을 때 가속 페달을 밟으면 배기가스가 계속 배출되기 때문에 내부기관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요지였다. 믿거나 말거나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어 감행하기로 했다. 장 씨가 운전을 맡고 난 최적의 돌파 경로를 찾으러 건너편 웅덩이 너머로 휘휘 건너갔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심하게 덜컹거릴 수 있다고 주의를 단단히 주고, 장 씨는 비장한 각오로 차를 후진시켰다. 나는 마른 길로 가늠 잡아 적당한 경로를 생각하고 한쪽 길을 가리켰다. 손가락은 물속에 잠긴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부웅 소리를 내며 내리막에 속도를 붙였다. 곧장 물웅덩이로 돌진했다. 바퀴가 물에 닿자 촤아아악 소리가 나며 양 옆으로 사람 키 두배만 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물살이 보닛을 넘실 타고 넘어 앞 유리창을 온통 뒤덮었다. 내리막 구간을 지났다. 이제 오르막을 지나기만 하면 됐다. 이때,

쿠쿵, 쿵!!!

커다란 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연이어 차가 휘청 흔들렸다. 변곡점 즈음이었고 차는 물웅덩이 한복판에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장 씨! 멈추면 안 돼!!" 생각이 같았는지 차는 쉬지 않고 물길을 헤쳐 나갔다. 마지막 물기둥을 피날레 폭죽처럼 쏘아 올리고 마침내 마른 길 위로 올라왔다.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온 2010년형 1.6L 4기통 5인승 니싼 리비나 MPV형 자동차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허겁지겁 달려와 보니 다들 참았던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 후룸 라이더를 관람한 흥분이 가라앉자, 귓등을 후려갈긴 둔탁한 소리가 생각났다. 차량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뒷목에 얼음을 얹은 것처럼 몸이 얼어붙었다.


물길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차 모양이 달라져 있던 것이다. 차량 하부를 덮는 커버가 반쯤 떨어져 나와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돌바위를 타 넘다가 긁히고, 물속을 달리다 땅에 처박혔으니 혀를 빼물고 기절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수밖에.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토샤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수리를 위해 인근 차량 정비소를 찾았다. 뒷좌석 우측 타이어에 펑크가 나 흐느적거리던 것도 때웠다. 보수를 드리려고 했지만 한사코 손사래를 치시던 사장님의 친절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고쳐 놓은 부분이 나중에 차량 반납 시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렌트 계약서의 '타이어 펑크 시 동일한 새 타이어로 교환해야 한다'는 조항이 뇌리를 언뜻 스쳤지만 잊어버리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사달이 났던 그곳은 나름 긴박했기에 사진으로 남길 순 없었다. 비슷한 느낌의 다른 장소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이 정도는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수난시대 難時代: 짐승으로 인해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하는 기간이나 시간



1. 나미비아의 에토샤 Etosha는, 한 번쯤은 들어봤을 세렝게티 Serengeti, 보츠와나의 초베 Chobe와 함께 사파리를 위한 아프리카 3대 국립공원이다.

2. 허가받은 가이드를 대동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세렝게티와는 달리 에토샤는 여행자가 직접 운전하며 초원을 누빌 수 있다.

3. 세렝게티가 세상에서 가장 드넓은 초원으로서의 상징성과 위용을 자랑한다면, 에토샤는 그보다는 작지만 더 가까이서 동물을 관찰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물론 ‘작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프리카 초원들끼리의 비교에서 하는 표현일 뿐, 에토샤의 면적은 조선 팔도 중 하나를 가뿐히 넘는다.

P.S. 이번 편은 시간을 일부 재배열해서 에피소드 위주로 남겼습니다. 에토샤 사파리의 본격적인 내용은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사흘간을 동트기 전에 일어나 텐트를 접는 중이다. 에토샤의 크기가 방대한지라 매일 캠핑터를 바꿔가며 탐험을 해야 그나마 맛보기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에토샤 지도를 펼쳐놓고 물 웅덩이 water hole로 표시된 곳 위주로 초원을 누비고 다녔다. 목마른 동물들이 나타나서 다양한 종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땅 위로 갓 솟은 태양은 오늘도 평야를 가로질렀다.


자동차의 수동 변속기를 보고 당황했던 순간이 가마득하다. 이제는 수동인지 자동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유롭고 익숙했다. 8단 자동변속기만큼이나 부드러운 조작이 가능해졌다고 할까. 오늘도 우리는 경쾌하게 초원을 달렸다.


따라가는 길은 수풀 우거진 쪽으로 나 있었다. 맞은편에서 커다란 사륜구동 SUV가 풀을 헤집고 나왔다. 그다지 좁은 길이 아니었기에 살짝만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는데 우리를 불러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너머로 점잖아 보이는 중년 여성분이 계셨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약간 상기된 상태였다.


"Hi dear, 저기 앞에 코끼리가 있어요"

"아 그래요? 코끼리를 처음 봐요!"

"그런데 좀 화나 있는 것 같아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여행 하세요. Bye!"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아직 야생 코끼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앞에 코끼리가 있어요'라는 말 뒤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수풀 속으로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야생 코끼리를 보면 도대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속도로 일분이 지날 즈음이었다. 오른쪽 수풀에서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2.5톤 트럭만 한 코끼리가 불쑥 수풀을 헤집고 나왔다.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얼른 시동을 끄고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찰칵찰칵 셔터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그게 거슬렸던 걸까. 순간 코끼리가 귀를 펄럭 펄럭거리더니 코까지 번쩍 세우는 것이 아닌가.


꿰에에에에엥!!!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연이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코끼리가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악!!!"

"빨리 출발해!!"

"아악, 도망가!!"


차 안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코끼리가 내지르는 소리와 사람이 내지르는 소리로 뒤엉켜 난장판이 벌어졌다. 뭐라도 보호막을 만들어야겠다는 하찮은 임기응변에 창문 버튼을 눌렀다. 미천한 삶이라도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짓이었다.


시동을 걸고 변속기를 1단으로 변경했다. 재빨리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창문 너머로 코끼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푸더더더덕.


엔진이 꺼졌다. 너무 놀라 초보적인 실수를 했다. 여유롭고 익숙한 조작이고 뭐고 손발이 따로 놀았다. 차 안의 비명소리가 더 커졌다. 다시 시동을 급하게 걸었다. 창문 너머로는 코끼리가 여전히 달려오고 있었다.


푸더더더덕.

"야아아아!!!"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클러치 컨트롤이 전혀 안됐다. 삶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인가. 죽음의 문턱에서 고작 수동 자동차 조작법이나 깨닫고 있다니. 누구는 죽음을 앞두고 삶의 12가지 진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은 흘러가야 하는데 억울하다.


거리가 멀지 않았는데 아직 어떤 충격도 없었다. 마지막 시도를 해봤지만 여전히 제자리다. 이제 삶의 미련을 접을 때인가 보다. 찰나지만 진공 상태의 무념무상을 경험한다.


'미안했다, 친구들아. 다음 생에는 수동차를 절대 타지 말거라...'


하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법. 차를 뒤집어 놓을 기세로 어기차게 달려오던 코끼리가 걸음을 멈췄다. 분기탱천한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엉덩이를 보이며 돌아서고 있는 것이었다.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잡는 것은 개인의 준비 정도와 능력에 달려있다.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차를 움직여 위험지역을 벗어났다.


“야 대박!!! 우리 죽다가 산 거 아니냐!? “

“우와! 아프리카에서 별 걸 다 겪어 본다!!”


침을 튀기며 서로의 죽다 살아난 감정을 공유했다. 죽음의 위협을 함께 이겨낸 동료들과는 끈끈한 유대감이 생긴다. 그리고 서로 격려의 말을 주고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똥 멍청아, 넌 거기에서 시동을 왜 꺼 먹냐? 완전 쫄아 가지고."

"야, 지는 쫄아서 소리를 얼마나 질러놓고는"

"아까 안 죽은 거 여기서 죽어 볼 테냐"


등의 따스한 말이 오고 갔다. 그리고 이 따위 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둥 무용담으로 승화시켜 나중에 여행기라도 쓰면 모든 진실을 폭로해 버리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티끌의 부끄러움도 없이 사실만을 정확히 기록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코끼리의 사이즈가 좀 과장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왜 코끼리의 화받이가 된 걸까 고민해 보면, 추측건대 아마 자기 무리에서 이탈한 나머지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던 게 아닌가 한다. 코끼리는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인데 주변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맞은편에서 SUV를 타고 수풀로 다가오는 여행자를 발견했다.


"저 앞에 코끼리가 있어요, 그런데 화가 좀 났어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들이 고맙다고 말하며 지나갔다. 실소가 나왔다. 왜냐면 '저 앞에 코끼리가 있어요' 이후부터 흥분에 찬 그들의 귀가 막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공유하게 될 경험이 너무 가혹하지만은 않길 바랐다.


야생 탐험대는 3편에서 끝납니다. 계속.

 





아기 코끼리? 2.5톤 트럭 정도는 아닌가 ㅎㅎ
코끼리가 달려들 때의 공포가 그대로 담긴 사진이다. '식겁의 순간'
야생 탐험대 3탄 맛보기 1
야생 탐험대 3탄 맛보기 2




* 갇힌 곳을 떠나고 싶은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zoo is noT enOUGH (동물원으로는 부족해)의 대문자를 따와 터프(tough)한 아프리카 시리즈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동경했고, 사진에 미쳤고, 아프리카를 꿈꿨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내용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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