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애틱 Sep 03. 2021

코로나 신인류의 탄생

말레이시아에서 소설 쓰고 앉아 있네


삐빅 삐빅. 귓전에서 알람이  울렸다.
눈을 번쩍 떴다. 악몽에 시달린 얼굴이 식은땀에 흥건했다.
뺨에 쩍 달라붙은 스마트폰을 휙 내던져 버렸다.


새벽녘까지 찌라시에서 본 폭로 사건의 연관 기사를 찾아보느라 깜빡 잠이 들었다. 나는 건강 염려증이 있는 사람이다. 인체에 미치는 전자파가 무병장수의 희망을 해칠 수 있어 스마트폰을 좀처럼 잠자리에 둔 적이 없었다.

 '괜히 쓰레기 같은 찌라시를 봐서는.. 아후, 피곤해..'

찜찜한 기분 떨어내려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옷장 구석에 처박힌 티셔츠와 반바지를 주섬주섬 들었다. 탈탈 털어 구겨진 주름을 대충 폈다. 세수를 하고 로션을 얼굴 구석구석 발랐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 얼굴이 쩍쩍 갈라진다. 아내의 말 중에서 보습이 주름 예방의 최선이라는 말은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 다른 말을 이렇게 잘 들었으면 밥상의 질이 여러 차례 업그레이드 됐으리라. 그나저나 얼굴 주름도 탈탈 털어서 펴지면 얼마나 좋을까. 보습 로션을 평소 쓰던 드라이에서 베리 드라이로 바꿔 주문했다. 이제는 베리 머치 좋아지겠지.


아래층에서 커피머신을 켰다. 커피숍에서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신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한걸음.. 두 걸음.. 스물다섯'

출근까지 딱 스물다섯 걸음이었다. 내일은 보폭을 더 넓혀 스물세 걸음에 도전해야겠다. 커피를 쏟지 않고 최소한의 걸음으로 출근하는 잉여스러운 챌린지 덕분에 다리가 제법 유연해졌다. 내일의 챌린지에 자신감이 생긴다. 아쉽지만 다리가 더 길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캘린더를 열고 하루 일정을 확인했다. 코스타리카, 부다페스트, 산호세에 있는 회사 동료들과 잡힌 화상회의 스케줄이 오늘은 없었다. 다시 말해 까치집을 지은 후줄근한 머리 그대로 출근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코스타리카, 부다페스트, 산호세에 있는 회사 동료들과 잡힌 화상회의 스케줄이 전에는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신세가 처량해 아무 생각이나 글로벌하게 해 본 셈이다. 이발한 기억이 희미한 걸로 봐서, 까치집이 없다고 한들 행색이 몰라보게 나아질 것도 아니었다.


말레이시아는 벌써 두 해에 걸쳐 락다운을 반복하고 있었다. 생필품 구입을 위한 외출 외엔 모든 야외활동이 금지되었다. 연일 하루 확진자가 2만 명이 넘는 데에 따른 발악적인 방역조치였다. 세계적으로 역병이 발병한 이례 수많은 변종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백신의 개발 속도는 변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각자도생을 읊조릴 뿐이었다. 한국에서라면 폭동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밤새 읽은 찌라시가 문득 떠올랐다. 바이러스 랩의 수석연구원이 폭로를 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실명까지 거론돼 있었다. 아몰 랑(Amol Lang, Ph.D) 박사라고 했다. 화면에 띄운 그의 블로그에는 아직 삭제되지 않은 메모가 맨 윗줄에 나왔다. 낚시질이라 확신했지만 괜히 목이 타들어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쓴 커피로 목을 축이고 메모를 클릭했다.


말레이시아는 수년간 전면 통행이 금지된 상황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도저히 집에 갇혀있질 못했다. 소위 외부를 돌아다니면서 에너지를 얻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루에 두 명 이상을 만나면 기가 소진해 이틀 이상의 휴식기를 가져야 하는 사람과는 반대 부류다. 오랜 감금에 지친 이들은 본능에 따라 외출을 강행했다.

방역수칙을 어긴 당연한 귀결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널리 보급된 백신으로 이미 형성된 항 T세포 항체(Anti-T cell antibody)의 면역효과는 미미했다. 오메가 변이 바이러스는 세포핵 속 DNA에 끼어들어 새로운 mRNA strain을 조합해 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를 통해 발현된 단백질은 사람이 외부에서 영구적으로 활동 가능하도록 신체를 변형시켰다. 오메가 변이는 숙주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앗아가는 대신 공생하는 방법으로 진화를 거듭한 것이다.

키틴질의 단백질은 등 흉추 부근에 빈 공간이 있는 혹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혹 덩어리는 24시간 주기로 끊임없이 재생산 및 교체되었는데, 임의로 키틴질의 혹을 제거할 경우 단백질을 공급받지 못한 부위에서 부패가 진행되면서 어디가미나를 (Udigamina-rL 형) 독소를 발생시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외부 생명체였던 미토콘드리아가 체내에 들어와 숙주와 공생을 선택한 이후, 생명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생체 에너지 ATP (Adenosine TriPhosphate)를 생산하면서 필수 세포로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동일한 전략을 펼치는 영리한 바이러스였다. 세균도 아닌 바이러스 수준임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진화였다. 바이러스의 발현 양상과 야외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감염군의 97.5%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착안해 바이러스는 외향팽이바이러스(Waehyangpang-i Virus, "W. Virus")로 명명되었다.

W 바이러스의 변이 속도를 백신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정부는 대응책을 마련하기 전까지 모든 정보를 비밀리에 붙였다. 군중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럼에도 지금 이 메모를 남기는 이유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실험 과정에서 감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등에는 점점 혹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몸이 점점 변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내가 키보드를 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싶다.


'쳇! 얼토당토않은 소리!'

역시 말 같지도 않은 걸 써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랑 박사의 폭로가 있은 후 머지않아, 흡사 달팽이 모습을 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W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었다. 실상은 랑 박사의 메모보다 더 참담했다. 감염자들의 뼈는 물러져 혹 속 공간에서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자가 돌연변이가 발생했고, 급기야 이동시 마찰력을 줄이는 액체를 내뿜어 신속히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다. 도로는 그들이 쏟아낸 끈적한 액체로 뒤덮여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공기를 타고 흘렀다.


비감염자들은 락다운 방역수칙의 창살에 갇힌 듯 꼼짝하지 않고 창문 밖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다.

'꾸물... 꾸물...'

감염자들은 창문 속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리를 더욱 미끄러져 다니고 있었다.


부작용도 뒤따랐다. 적도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 때문에 말라죽는 사람들이 속출한 것이다. 혹을 짊어진 감염자들의 이동 경로가 엇갈려 부딪히기라도 하면, 강성이 미흡한 혹들은 충돌 에너지를 이기지 못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거리는 고약한 악취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대기업들은 기존에 없던 상품을 앞다투어 출시했다. 진짜 비雨 와 유사한 물질을 합성해 말라 가는 피부에 수분을 공급하는 이동식 습윤 장치를 판매했다. 태양열을 전기로 전환해 혹 안에 시원한 공기를 불어넣는 밴틸레이션 시스템, 충격에도 혹이 부서지지 않도록 안티 쇼크 버퍼 코팅 제품 등이 쏟아져 나와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외출을 부추겼다. 기괴한 모습에 공포를 느낀 사람들은 더욱 꽁꽁 집안에 숨어들었다.


W 바이러스의 감염자는 점점 늘어났다. 애꾸눈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먼지가 수북이 쌓인 창문 위로 적도의 석양이 내려앉았다. 창문 밖으로 W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꾸물꾸물 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와 장거리 연애를 하던 시절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재회했을 때는 그동안 가고 싶던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을 적은 리스트를 완수하느라 하루가 모자를 때였다. 리스트를 절반도 완수하기 전에 더는 못하겠다고 비명일 질러 댔더랬다. 집에만 가만히 있고 싶어 했던 호사스러운 그 시절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에필로그.


삐빅 삐빅. 귓전에서 알람이  울렸다.
눈을 번쩍 떴다. 악몽에 시달린 얼굴이 식은땀에 흥건했다.
뺨에 쩍 달라붙은 스마트폰을 휙 내던져 버렸다.


'헉.. 꿈이었어! 외향팽이바이러스니, 달팽이 인간이라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스탠드 아래의 컵에 손을 뻗었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충격이 아직도 손을 떨리게 했다.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기분 전환을 위해 창문을 활짝 제쳤다. 자욱하게 먼지가 날아 올라 눈이 매콤했다.

'응? 먼지가 언제 이렇게 쌓여 있었지. 분명히 지난주에 청소를 했는데..'  

열대의 뜨거운 공기가 훅 불어 닥쳤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비린내는 뭐지.. 어디서 맡아본 냄새인데.."


끝.



<Image by Romolotavani@thescientist>



매거진의 이전글 소주가 그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