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를 마시면 절로 나오는 크아아 소리를 한숨처럼 뱉는다. 다음 순서로 근심을 담은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잔을 내리면 딱 그럴싸하다. 특별한 걱정같은 건 없지만 그냥 소주를 마시는 의식같은 거다. 맥주를 더 좋아하지만 더 나이가 많은 큰 어른같은 형님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으레 마시는,고뇌를 시각화해주는 담배 같은 소품, 딱 여기까지가 서른 초반 총각이었던 내가 생각한 소주였다.
소주가 불러오는 절절한 애환이나 레트로 감성을 담아낼 깜냥은 되지도 않아서 감히 소주를 가지고 글을 쓴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쓰고 있는 건 소주가 그리운 마음을 달래야하기 때문이다.
소주와 첫 인연은 엉뚱했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 로스앤젤레스로 새로운 도전을 한답시고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원대한 포부와는 반대로 통장은 쪼그라들고 있었다.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필요했다. 천운으로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소주 유통 회사에서 실장으로 일을 하게 됐다. 엘에이 일대의 한국 마켓과 주점을 납품처로 가진 소규모 회사였다. 겉으로는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납품 현황을 체크하고 몇 안 되는 직원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속으로는 주점 주인과 마켓 창고지기들에게 주문 좀 더해 달라고 조르는 게 주된 일이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수년이 지난 지금도 코리아타운의 마켓 위치를 훤하게 그릴 수 있게 됐지만, 태평양을 건너게 한 포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반년을 채우지는 못했다. 잠시지만 궁한 생활에 단비를 내려준 그때가 소주와의 첫 인연이었다. 회사 창고에서 몰래 뽀려 와 홀짝인 소주는 비밀이다.
소주에 빠져든 결정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아내를 빼놓을 수 없다. 요즘은 소주 좀 그만 찾으라며 눈을 흘기지만 이유 있는 항변이 있다. 내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다. 자랑이지만 아버지에게 술을 배운 덕분인지 거나하게 취해도 자세를 다잡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기분이 좋아지고 수다스러워지는 정도랄까. 연애 당시 우리는 초 장거리 커플이었는데 나는 엘에이, 여자 친구는 홍콩에 살 때였다. 여친은 깜짝 프러포즈를 받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렇다 해도 일 년에 한두 번 며칠간 만나는 사이에서 뭔가 깜짝을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나면 매일을 붙어 있는데 서프라이즈는커녕 방귀라도 몰래 뀌면 다행이었다.
휴가 기간 동안 여자 친구가 한국에서 가족과 지낼 때였다. 이때를 틈타 서프라이즈를 감행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만나기로 한 날보다 하루 더 빨리 나타나 깜짝 청혼을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공항에서부터 비행시간까지 포함하면 12시간이 더 걸릴 텐데, 그동안 연락이 두절되는 이유를 둘러대기가 어려웠다. 결국 여친의 온 가족을 가담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우리 어머님 그러니까 당시 예비 장모님과 작당모의를 해야 했다. 하루 일찍 몰래 비행기를 탈 테니 그동안 딴 데로 정신을 끌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가족 모임을 하시는 저녁 시간에 맞춰서 나타나겠다는 계획이었다. 어머님과 언니들은 한마음으로 시선을 분산시켜 주셨고, 나는 언니의 가족들과는 처음으로 모두 함께 만나는 자리가 될 터였다. 만약 어색해서 숨 막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 자리보다 더 적당한 때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옷을 입고 자꾸 밥상에 나타나는 딸내미에게 옷 좀 제대로 입고 나오라는 어머니의 성화가 있었고, 같은 이름의 빌라가 1, 2차로 나눠진 줄 모르고 엉뚱한 데서 한 시간을 낭비한 후 마침내 서프라이즈에 성공했다.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저녁 자리에 나타난 모습에 여친은 화들짝 놀랐고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청혼을 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예비 식구를 맞을 준비가 된 가족은 흥이 한껏 올랐다. 고조된 흥은 자연스럽게 음주를 통해 폭발했다. 내가 미처 몰랐던 게 있는데, 이 가족은 한때 가족 동아리를 만들어 친척과 소주 모임을 주기적으로 벌이는 분들이었고, 동이 틀 때까지 맥주를 궤짝으로 마시다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어리둥절해하던 분들이었다는 것이다.
열명이 앉아도 넉넉한 식탁을 소주병으로 띠를 두를 때였다. 동갑인 작은 처형은 손세정제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뚜껑 달린 쓰레기통을 굳이 열고 닫은 뒤 뚜껑 위에 쓰레기를 올려놓는 기행을 펼쳤다고 한다. 또 여친에게 준비한 편지를 단둘이 읽으며 청혼했던 순간을, 가족들 앞에서 혀 꼬부라지게 재연했던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정말이지 이 기억은 상실해 버리고 싶다. 그렇게 소주가 내 인생에 처음으로 옴팡지게 달려들었다. 이후 모든 가족 모임에는 소주가 함께 했다. 가족 여행이라도 간다 치면 서둘러 캐리어에 한 보따리 소주를 쟁여놓고서야 한시름 놓았다며 농담을 던지고는 했다. 이제야 나는 소주의 진짜 맛을 알게 됐다.
말레이시아는 코로나로 락다운을 하고 두 해가 흘렀다. 우리 집은 한인 밀집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한국 마트를 가려면 30분은 가야 한다. 지금은 10킬로 이동제한이 있어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주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진 거다. 마트 소주 한 병 값이 약 6천 원인 건 차치하고 구경도 쉽지 않게 됐다.
가끔 한국 마트에서 장바구니를 배달시키는 날이 있다. 그날은 아내와 소주를 마시는 날이다. 그래도 항상 뭔가 허전했다. 크아아 하는 소리가 사라진 대신 '음, 오늘은 단데?'가 나와서 일까. 오만상을 찌푸리는 대신 스멀스멀 웃음이 흘러나와서 일까. 아내가 이제는 하다못해 소주로 글까지 쓴다며 소주 중독자라고 눈을 흘기면 이게 다 자기네 가족 때문이거든 이라고 항변할 거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소주만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동안 방역 규칙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없는 건 여전하다. 지겨운 코로나가 끝나고 빨리 소주를 마시러 한국으로 날아가는 날을 기다린다. 요즘 소주가 유난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