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애틱 Sep 29. 2021

천둥 치는 연기의 나라에서 생긴 일

포토에세이 zoo is noT enOUGH #12 잠비아 리빙스톤


여행 중엔 뜻밖의 일이 자주 생긴다. 특별한 건 없지만 일상보다 짧은 호흡으로 휘몰아치는 느낌이다.

처음 만난 사람의 친절로 난감한 상황을 헤쳐 나간 후, 악랄한 표정의 행인과 부딪혀 안경이 볼품없이 찌그러질 수도 있다. 물기를 머금고 작동을 멈춘 카메라 때문에 심란한 마음을 겨우 추슬렸더니, 아프리카의 참담한 이면을 마주하고 말문이 막힐 수도 있다. 하루가 넘도록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다 예상치 못한 인연이 생길지도 모른다. 일 년 분할로 나눠도 벅찬 마당에 일시금으로 내라는 형국이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버스 정거장이었다. 주유소를 겸한 곳인데 인적이 드물었다. 간혹 지나가는 녹이 슨 트럭을 따라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버스가 오긴 하겠지?'

배웅 나온 친구들이 옆을 지켜주었다. 먼 길 굶지 말라며 불쑥 내민 봉투에는 옥수수, 사과, 바나나, 주전부리아쉬움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제 각자의 길을 향해 흩어져야 했다. 날이 밝으면 서로 다른 곳에서 하루를 맞이하게 된다.

앞으로 겪게 될 경험을 축복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 서로 겪은 건 그때 또 나누자!'


이튿날, 흙바닥 위 국경을 통과해 도착한 곳은 잠비아였다. 지난밤 버스 거대한 냉장고를 연상시며, 에어컨 바람이 뼈마디를 살벌하게 파고들었다. 때아닌 추위와 사투를 벌인 또 다른 승객이 통로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그 역시 긴 여정에 지쳐 보였다.


"버스 타는 시간이 너무 길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맞아요, 추워서 잠도 못 잤더니 너무 피곤하네요, 그런데 어디에서 왔어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아, 반가워요! 내 핸드폰 한국에서 만든 거예요."

구형 삼성 폴더폰을 꺼내더니 작은 화면으로 대여섯 살 남짓 꼬마 세 명을 보여줬다. 유독 하얀 눈을 반짝이며 웃는 모습이 아빠와 똑 닮았다. '뜬금없이 아이들 자랑을 하고 싶었구나? 아빠들 팔불출은 만국 공통이네. 핸드폰 자연스러웠어.'

연이어 집 사진을 보여줬다. 아프리카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는데 잘됐다.

집은 웬만한 가전제품이며 가구를 멀끔하게 갖췄고 풍족해 보였다. 그런데 묘하게 우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익숙한 마감재가 아니기 때문인지, 가구 배치의 영향인지, 이국적인 실내장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나단'은 나미비아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동갑내기 의사였다. 밤새 버스를 타고 잠비아에 사시는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꼬깃꼬깃 주름진 과자 봉지를 꺼내서 내게 내민다. "아직 뭐 못 먹었지? 배고플 테니 이거라도 먹어."

나는 답례로 찐 옥수수를 건넸다. 아프리카 사람과 정을 주고받았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흙길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국경 앞이라기보다 읍내 시장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길은 아스팔트로 뒤덮힌 인공적인 모습이라면 아프리카의  흙길은 투박하지만 정겨운 맛이 있었다.

일수 가방을 앞 춤에 두른 허름한 행색의 사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뭐라 뭐라 하더니 조나단과 돈 꾸러미를 주고받았다. 현금으로 환전을 하는 환치기였다. 국경 검문소 바로 앞에서 버젓이 불법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돈을 바꿨다. 옆에서 환전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조나단이 불쑥 환전상에게 노기 띤 음색으로 말을 던졌다. 당황한 환전상이 지폐 몇 장을 더 꺼내 멋쩍게 주는 것이 아닌가.

"조나단, 무슨 일이야?"

"저 사람이 돈을 덜 바꿔주잖아. 내가 뭐 하는 짓이냐, 그랬지."

"아, 그래서 나중에 더 준거였구나? 고마워."

"응, 잘 모른다고 사기당할 수 있으니까 조심해."

불법인 중에도 질서유지를 위한 암묵적인 룰이 있었나보다. 외국인이라 깔보고 슬쩍 선을 넘은 환전상 무안해했다. 이미 손에는 수백만 콰차가 쥐어져 있어 정신이 없었다.

2012년 당시의 잠비아는 화폐 인플레이션과 화폐 개혁으로 진통을 앓을 때였다.


잠비아에서 쓸 핸드폰 심 카드를 살 때도 옆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친절이 든든하고 고마웠다. 적재적소에서 받는 뜻밖의 친절이 그 나라 사람에 대한 호감도를 잔뜩 올려놓았다.


잠비아 국경 검문소



잠비아에는 '천둥 치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 오아 툰야 폭포가 있다. 빅토리아로 더 알려진 곳으로 세계 최대 낙차 108m의 폭포라 했다. 사진으로만 보면 '쩍' 갈라진 땅의 틈새로 한강만 한 강물을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모습이다. 실은 2억 년간 화산암을 조금씩 침식시켜 만든 작품이었으니 '사각사각' 갈라진 땅이라 표현하는 게 맞겠다.


먼저 폭포를 다녀온 사람이 거듭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물을 조심해야 해요. 돌바닥도 미끄러운데, 일단 앞이 안 보여요", "레인 코트는 꼭 챙겨 가세요." 속으로 생각했다. '어이구, 저는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회사도 다녔다고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멀리 숲속에서 구름만 한 연기가 피어났다. 짐승 울음 같은 '우르릉' 소리가 뒤따랐다. 후로 20분을 더 달리고서야 정체를 마주했다. 멀리서도 드러나는 크기의 반증이었다.

숲속 장막을 뚫은 굉음이 땅을 흔들다. 천둥 치는 연기라 이름 붙인 건 기가 막힌 작명이다.

매표소 앞에는 카메라를 수중 팩에 담은 관광객도 보인다. '겨우 폭포 구경하는데 물속에서 쓰는 수중 팩이라니, 오버도 적당히 해야지.' 장비 자랑이나 하는 꼴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즈음에서 한국에서부터 미리 준비해 온 상하 분리형 최고급 비옷을 입었다. 배달의 기수가 빗속을 뚫으며 성능을 검증한 우수 상품평이 빛나는 비옷이다. 방수포로 카메라 가방을 덮었다. 이제 준비는 모두 끝, 출발이다.


"촤아아아아아악!!!"

물 폭탄이 터졌다. 이건 테러다. 물보라가 온몸을 상하 전후좌우에서 내리쳤다. 생각하기 전 몸이 먼저 반응해 뒷걸음으로 도망쳤다.

"방금 본 건 뭐지!?"

잠시 숨을 돌리는 틈을 타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초당 3억 리터가 넘는 물이 백 미터 아래로 꽂히면서 반작용과 역풍을 타고 몰아닥친 물보라였다. 폭포 자체에서도 물이 튀어나와 입체적 방향이 완성된 거다. 우수한 대한민국 비옷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물 폭탄으로 뛰어들었다.


빅토리아 모습 드러다. 수천 톤의 물을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잠베지강은 벼랑 끝에서 순식간에 아가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무서운 굉음은 감각을 압도했다. 시청각이 사로잡힌 탓에 하늘과 땅이 무너져 내리는 착각마저 든다.

물보라에 어느새 속옷까지 축축해졌다. 방진 방습이 된다는 카메라지만 물은 사진기의 천적이다. 궁색해도 비닐 수중 팩을 급조했다. 아까 그 관광객에게 달려가 수중 팩 좀 빌릴 수 없겠냐 부탁할 판이다. 어쭙잖게 꼴불견이라 생각한 가벼움이 부끄러웠다.


열악한 상황 따위가 열정을 가둘 순 없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프레임에 담아야 한다. 내 라이벌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니까!

"찰칵, 찰칵, ㅊ......"

카메라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타이머 버튼을 오작동 시켰나 보다. 다시 셔터를 눌렀다. 천둥 치는 연기 소리만 귓가에 왕왕거릴 뿐이다.

'아…. 이런…!' 카메라 액정이 시커멓게 꺼져버린 걸 확인하고 탄식이 흘렀다.

물기를 머금은 카메라가 작동을 멈춰버린 것이다. 심장도 따라 멈추는 기분이었다.


물보라 때문에 패닉에 빠진 일행의 모습을 담은 직후, 카메라가 멈춰 버렸다.


게스트하우스 앞마당 햇볕이 드는 양지바른 곳에 사진기를 뉘었다. 가방에서도 물이 콸콸 쏟아졌다. 폭포를 보는 내내 찌뿌드드했던 하늘은 무심하게 개어왔다. 뿌옇게 습기 찬 렌즈만큼이나 머리가 혼탁했다. 고추 말리듯 바닥에 널어놓은 카메라 본체, 렌즈, 메모리카드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쭙잖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 코스프레는 이제 끝인가 보다. '사진기야, 제발 바짝 말라라….'



강원도 동강에서 래프팅할 때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올해는 강물이 줄어 급류가 예전만 못하다는 거다. 래프팅을 하는 건지 돛단배 유랑을 하는 건지 헷갈린 게 다반사다.

빅토리아를 끼고 있는 잠베지강에서의 래프팅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아프리카 탐험가가 놓칠 수 없는 일이다.


래프팅 예약을 했다는 말을 들은 숙소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20대 후반 시카고 출신의 여성 직장인이었는데, 회사에 신물이 나 때려치우고는 곧장 아프리카에 왔다고 했다. 동질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며칠 전 본인이 래프팅할 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갔다.

"물살이 너무 세서 죽을 것 같았는데 힘든 코스를 지나고 좀 편한 구간에 접어들 때였어. 마음을 놓고 있는데 글쎄, 멀리 보이는 뭍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시체가 있는 게 아니겠어! 얼마 전 뉴스에서 피크닉하던 남자가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는 소식이 있긴 했어. 그 사람이었나 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를 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살이 세서 옷이 다 벗겨졌더라고. 상처가 난 몸이 온통 물에 불어 있었어. 그런데 거기도 불어서 팔뚝만 해져 있더라고." 그러면서 팔꿈치로 손을 갖다 댔다.

안타깝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한 장면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잠베지강의 급류가 무섭다는 경각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급류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래프팅하는 동안 집채만 한 물살이 보트를 후려친 게 여러 번이었다. 홍수에 불어난 계곡처럼 성난 물살 같았다. 물결이 어찌나 빠르던지 방향을 잡느라 혼이 쏙 빠졌다. 곳곳에 박힌 바위도 피해야 했다. 옆에는 보조 보트가 항상 따라붙었는데, 급류에 휩쓸린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서였다. 잠베지강의 급류를 타는 동안 온몸이 아드레날린으로 점령당했다.



래프팅이 끝난 후, 아드레날린이 널뛰던 자리를 피로가 조금씩 메꾸던 즈음이었나보다. 래프팅 가이드가 여전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물에 젖은 옷이 몸에 척척 감기는 찝찝함처럼 기억에 붙어 있었다. 가이드는 2인 1조, 맨발로 거친 산길을 걸어 보트를 옮기던 일꾼의 보스쯤 되는 아프리카 현지인이었다. 사연은 이랬다.


래프팅 조는 유럽, 캐나다 남녀 백인 다섯 명과 동양인으로는 내가 유일했다. 우리 조를 담당한 가이드는 유독 동양인을 깔보는 말투를 썼다.

비록 동강을 통해서지만 나는 래프팅에 익숙했고 특히 여성과 비교를 당할 정도로 힘이 약하진 않다. 그런데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에게 노 젓기를 할 때마다 '일본 놈 노 젓기'라고 조롱했다. 깔짝깔짝 노를 젓는다나 뭐라나. 이미 손바닥은 빨갛게 달아 있을 때였다.

그걸 시작으로 코리안, 재팬, 차이나는 원래 빨리 못 움직이냐, 느려 터져서 급류에 휩쓸려 죽겠다는 둥 거슬리는 말이 많았다. 누구라도 쉽게 조롱할 수 있게끔 입에 붙어 있는 레퍼토리였다. 질 나쁜 농담이었다.

같은 조의 캐나다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며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 나라 사람이 인종차별 하는 말은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니. 믿을 수가 없어."

항의하면 속 좁은 코리안이 될 것 같아 객쩍은 소리로 치부했지만,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잔잔한 곳에서 쉬던 중, 한 명이 보트에서 떨어졌다. 가이드도 일행도 멀뚱멀뚱 보는 상황이었다. 보다 못해 나서서 구명조끼를 잡고 보트로 끄집어 올렸다. 그것마저도 '그걸 왜 도와주냐'며 이죽거렸다.

"한국 사람은 원래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줘. 너희 나라 사람은 서로 안 도와주는 모양이구나?"

소심한 복수를 했다. 차마 내뱉지 못한 '그래서 너희가 그 꼴을 못 면하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같은 일을 겪게 되면 캐나다 사람이 했던 말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해 곱씹었다. 다행인지 그 후로 그 말을 쓸 기회는 오지 않았다. 넬슨 만델라의 나라, 흑인 인권운동과 식민지 노예의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 겪은 일이다.


탈의실로 돌아가는 트럭 위에서, 비슷한 처지였던 대한민국의 급격한 성장을 부러워했던 가이드가 말했다. "한국은 이제 잘 산다면서요. 좋은 집도, 차도 많아요?" 백인을 향해 열등감을 드러내기에는 강자를 향한 태생적 주눅이 베어져 있을 거다. 선택적 이죽거림의 대상이 그중 만만한 동양인이었을 테다. 비겁했다. 한편으로는, 분노보다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이십만 원 큰돈 쓰고 별소릴 다 들었으니, 이만큼은 욕을 해야 속풀이가 될 것 같다. '앗, 간과한 게 있네. 영어가 유창했으면 따질 배짱이 생겼을지도 몰라. 영어를 잘해야 해, 빠직!'


친구들과 헤어진 쓸쓸한 마음을 아프리카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채워주던 조나단은 무척 우호적이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남은 여정에서도 그런 사람이 더 많을 거라 믿었다.

그나저나 종일 널어놓은 카메라는 바짝 말랐어야 할 텐데 어찌 됐나 궁금했다. 계속.






숙소 주변 및 내부, 그리고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



* 갇힌 곳을 떠나고 싶은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zoo is noT enOUGH (동물원으로는 부족해)의 대문자를 따와 터프(tough)리카 아프리카 시리즈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동경했고, 사진에 미쳤고, 아프리카를 꿈꿨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내용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몄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야생 탐험대 (3) 빅파이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