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화(解語花) 노릇의 적극적 포기
말을 못해서 불편했던 그간의 기억을 모아본다.
#1. 정소연 변호사는 한국일보의 칼럼에서 혼자 해온 운동이라며 한 운동을 설명했다.
이른바 ‘성비 맞추기’ 게임이다. 세 개의 규칙은 단순하다.
1)어떤 자리에서든 남성이 더 많이 말하면, 나도 그만큼 말해 남녀 간 발언 절대량의 젠더 균형을 맞춘다.
수준은 그 다음 단계 목표고, 일단은 어쨌든 남자가 말하는 만큼 여자도 말한다.
나는 이걸 보고 축구 경기에서 볼 점유율을 생각했다. 볼 점유율이 어느 정도는 돼야 그다음에 서로 동등한 정도의 해볼 만한 게임이 되듯, 말 점유율도 서로 비슷해져야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이렇지 못하다면 그건 남자에게도 불리한 게임이기에.
2)내가 결정권이나 추천권을 가진 경우 무조건 여성을 먼저 추천한다. 성비가 1:1로 맞는 경우조차 거의 없다. 그러니 내게 누군가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이 오면 성별을 우선 고려한다.
일단 이런 기회가 별로 오지 않기 때문에 이 전략은 매우 유효할 듯하다.
3)같은 자리에서 여성이 발언하면 최대한 지지하고 동의한다. 특히 성비가 불균형한 자리에서 여성이 하는 말은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진 말일 때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http://www.hankookilbo.com/v/e3ab366debe347d6ad8d32faa35bd281
이 글을 읽고 확 깨어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다시 얻은 기분이랄까.
이 칼럼을 읽은 후부터 나도 이 규칙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만 효과는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나는 30% 정도의 점유율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목표는 50%이어야 했다.
최근 긴즈버그 대법관의 역발상에 또 놀랐다.
9명 대법관이 전부 여자가 돼도 상관없다니.
남성이 전부였을 때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니까.
레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영화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에서 레아 공주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이 말하는 장면은 상영시간 386분 중 63초"라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그런데도 이런 영화는 남자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영화라고 한다.
그런데 여성의 발언 점유율이 이것보다 높은 영화는 '여성 영화'로 규정해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
'알쓸신잡'을 볼 때도 생각했다. 왜 전문가 그룹 중에 여성은 없을까.
최근 영화 '오션스 8'이 나오는 걸 보니 할리우드에서도 이제야 그 균형을 맞춰간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디서나 여성은 구색 맞추기 즉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지만 할 수는 없는 꽃) 역할을 해왔던 게 사실이다.
#2. 학회에 가보면 아직도 젊은 여성은 뒤치다꺼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여성들은 마이크와 PPT를 세팅하고 학자(그 여성들도 다 학자인데!)들이 발표할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다 세팅이 끝나면 우아하게 남성 연사들이 나와서 발표하곤 한다. 많은 여성들은 플로어에 앉는다.
연사는 남성, 청중은 여성의 구도가 명확하다. 그런 학회는 솔직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냥 나와버리게 된다. 성별 세대별 대결구도가 눈에 띄게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학회에서 다양성에 대해, 정의에 대해 얘기를 듣기는 어렵다.
#3. 이런 경향성은 학원 설명회에서도 나타난다.
초등생 논술과 토론 수업으로 유명하다는 한 대치동 학원가에 레벨테스트를 보고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아이의 수준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개별상담보다는 설명회라기에 시간을 내서 참석해보았다.
'좌뇌와 우뇌' 하는 설명의 방식이 균형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남성 본부장 한 명이 엄마 60여 명을 모아놓고, "자 이렇게 호응 없으면 저 오늘 강의 못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하면서 굉장히 고압적인 태도로 설명회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일단 그 구도. 사진을 찍어놓고 본다면 말도 안 되는 그 성비. 단언컨대 그곳에 있는 엄마들의 집단지성이 그 연사보다 훨씬 높을지언정 오직 아이를 볼모잡아 연사는 매우 당당하게 자신만의 이론을 전개하고 엄마들은 그걸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소위 미래 융합교육을 한다는 대치동의 현실이라면 참으로 절망스러웠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학원가에서도 대체로 원장, 실장 등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남성이고, 그 밑 스태프들은 여성이다.
난 그런 가치관과 싸우기 위해 그런 학원을 가지 않지만 그게 아이에게 장차 도움이 될지 않을지는 미지수다.
#4. 나는 여기에 더해 두 명의 아들과 성비 문제에 대해 싸워야 한다.
두 아들을 낳고 딸을 낳으니 주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유 애가 셋이에요? 그래도 성공하셨네요"
"네, 딸 낳고 싶어 셋째까지 낳았어요"
"아유 순서가 바뀌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들 둘은 그대도 목매달이야."
그런 얘기를 못이 박히도록 들은 둘째 아들이 존재를 부정당한 기분이 드나보다
"엄마는 아들이 싫어요?""엄마는 맨날 딸만 좋아해"라고 한다.
이런 신중치 못한 나의 발언(딸 낳으려고)과 사회의 발언들(아들 셋이면 어쩔 뻔했어) 때문에
나는 아들과도 성비 전선을 형성하게 됐다.
초등학교 여혐이 많다더니, 나까지 그 한몫을 거드는 원인 역할을 한 거 같아,
잘 알아듣게 설명을 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들에게 "Battle of sexes"같은 영화를 보여주며 여성들이 차별받은 역사를 공부시키며
남자로서 어떤 감수성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어쩐지 아직도 수긍을 못하는 걸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5. 고린도전서(14: 34-35)는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고 말한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5:21-32)에는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고 쓰여있다. 아내는 남편이 머리기 때문에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가 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상 오늘 미사에서의 복음말씀이었다.
난 어릴 때 영세를 받았는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란 구절을 외며 가슴을 치는 기도가 참 싫었다. "왜 내 탓만일까" 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기도의 의미와 효능을 안다. 내 탓을 할 게 너무 많아진 탓이다.
언젠가 나도 위의 성경구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아니면 성경이 바뀌어야 하는 걸까.
왜 수녀님은 미사를 집행할 수 없을까.
더 많이 말하는 수밖에 없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점유율 얘기를 한 정 변호사의 규칙은 참으로 적절하다.
좀 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랐다면 참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말하면 징징거리거나(sissy) 시건방지거나(bossy) 한 게 아니다
오히려 당당하거나(bossy) 부드러울(sissy) 뿐이다.
아니, 여성들은 그저 말할 뿐이다.
해어화의 프레임은 여성의 목소리가 깨트릴 수 있다.
김재수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적절한 실험 결과를 보여준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쓴 노스이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리사 펠드먼 바렛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합니다. 만약 어떤 여성이 감정을 잘 드러내면, 사람들은 그를 두고 리더십에 적합하지 않고 안정적인 조직 운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어떤 여성이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가 따듯하지 않고 신뢰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상반된 편견이 동시에 존재하기에, 여성 이슈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찾는 일이 빈번하게 실패합니다. 여성과 관련한 많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바렛 교수의 실험은 여성에게 원인을 귀착시키는 사람들의 편향을 잘 보여줍니다. (관련논문 3) 남성과 여성의 감정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살펴보는 실헙입니다. 사진 속의 남성과 여성의 얼굴은 적당한 정도로 슬픔, 공포,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진 아래에는 ‘직장 상사로부터 고함 소리를 들었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욕설을 들었다’와 같은 짤막한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이 왜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진을 제시받은 실험 대상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사진 속의 사람은 감정적입니까, 아니면 운이 나쁜 날을 보내고 있습니까?
더 많은 비율의 실험 대상자들이 여성에 대해서만 “감정적”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찡그린 얼굴의 남성에게는 뭔가 나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원래 감정적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드러난 것입니다. 화가 나거나 슬퍼하는 원인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실험 대상자들은 사진 속의 여성들을 감정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면 너무나 분명하게 제시된 원인마저 무시합니다. 원인을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에 결부시켜 버리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성추행과 성폭행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에 대해서도, “성폭력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성이 먼저 유혹을 했을 것이다”, “여성이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다”와 같은 말들을 하는 남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피해자에게 문제의 원인을 묻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래 동수 정치를 위한 대화는 아주 적절한 기획 같다!
여성참정권이 규정된 1948년부터를 시작으로 한 듯하다.
하지만 다만 과거 100년이 아니라 미래 100년도 같이 얘기했으면 한다.
즉 여성의 정치적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달라져야할까)?를 같이 말하는 것이다.
한나아렌트의 말대로 "정치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활동적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획이 더더더 많아져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