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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하이 SG Oct 30. 2022

장모님 장인어른과 싸우고 1년간 대화 하지 않은 사연

상하이 장인어른 장모님

함께 놀러가면 항상 일찍 일어나시고, 먼저 식사하신다. 운이 좋은날은 우리가 호텔 조식 입장할때 뵙기도 한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때 장모님, 장인어른과 대판 싸우고 1년간 대화를 하지 않은 적이 있다.


음... 뭘 싸웠겠나? 사실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들었고, 내가 삐쳐서 1년간 대화를 하지 않은 것 뿐이다.

글을 쓰려니 그때 생각이 나며 마음이 좋지는 않다.


경과는 이렇다. 

결혼후 8년까지 아내와 장모님 장인어른이 자주 싸웠다. 

물론 감사한 일도 두번이나 있다. 


첫번째 감사한 일, 

아이가 만 2살때 까지는 장모님, 장인어른과 함께 살았다. 참 못할짓인데 그땐 방법이 없었다. 아이가 3살때쯤 분가를 했고, 그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저녁까지 아이를 봐주셨고, 금요일 저녁에 데리고 와서 월요일 오전 혹은 일요일 저녁에 아이를 다시 맡기는 방식이었다. 장모님이 아이보기 힘들어하시니 성질을 내셨고,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아내와 부딪쳤다. 아내와 장모님 장인어른이 대판 싸우고 이젠 아이를 안봐준다고 하고 손녀를 놓고 당신들 집으로 가셨다.

그 이야기인즉슨 우리에게 빌어라 그럼 다시 아이 봐줄께~ 였을텐데 성격있는 아내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다.  

하여간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빌지 않으면 회사를 다니던 말던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장모님, 장인어른이 아이를 놓고 가신날은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난리가 났다. 아내는 울면서 회사를 관둬야 하나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첫째 갑작스러웠고 둘째, 아이가 어려서 일하는 이모님을 모실상황도 아니었다. 아내에게 걱정을 말라며 급하게 한국에 있는 어머니께 SOS 를 쳤다. 어머니가 오실 4일동안 하루는 아내가 이틀째는 내가 이렇게 번갈아가며 휴가를 쓰고 아이와 함께 있었다. 어머니가 도착후 일주일간 아이와 함께 하며 적응을 했고, 딸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갔다. 우리가 중간에 아이를 보러 한국에 가긴 했지만 그렇게 8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7개월이 지나서 장모님 장인어른이 다시 아이를 봐준다고 하셨고, 아이를 다시 데리고 왔다. 돌아오니 아이가 한국말만 하고 중국말은 할줄 모르니 당황하기도 하셨고, 그렇게 힘들게 다시 키우기 시작했다. 


감사하다고 한 이유는 한국아이인데 한국말을 잘 못해서 고민일 때였다. 한국에 엄마랑 두 여동생과 함께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친 것이다. 어린이 집도 다니며 친구들도 사귀고 나름 안정감 있게 잘 지냈다. 우리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하여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두번째 감사한 일, 

다시 3년후 아이가 유치원 다니시 시작할때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아내는 과거와 달리 울고불고하진 않았다. 침착하게(?) 장모님 장인어른에게 2주후면 구정휴가니 그때까지만 참아달라고 했고, 구정때 한국의 모든 가족이 태국에서 만났고, 태국에서 그때 다시 어머니에게 딸아이를 맡겼다. 그리고 딸아이는 8개월이 지나 중국에 왔다.

덕분에 이젠 한국어를 모두 마스터 한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친할머니가 되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적고 보니 아내와 나도 이상한 부모다. 딸아이를 6개월넘게 두번이나 다른 나라에 맡겨두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그것밖에는 다른 대안은 생각나지 않았다.


삼진 아웃이라는 생각은 했다. 한번더 그러신다면 이젠 다시는 맡기지 않으리라...얼굴을 안본다고 말하고 싶으나 아내의 부모님인데 그걸 내가 결정할 권한은 없으니 아이만 안맡기는 것으로 협의를 했다. 사실 난 더이상 장모님, 장인어른께 우리 딸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은데 여기 중국에서는 아이에게 못된짓을 할까봐 아이를 잃을까 해서 사람을 인지하지 않는 너무 어린 아이는 굉장히 조심히 한다. 참 그러고 보면 한국이 그래도 기본 신뢰들은 있고 살기는 좋다. 하여간 그래서 외부사람에게 아이를 맡기지 못한다. 


그동안 감사했고 이젠 유치원도 다니고 우리가 직접 키운다고 했더니 다시 굳이 또 딸아이를 평일에 봐주겠다고 하신다.


장모님 댁 근처의 유치원을 다녔고, 딸아이가 드디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이젠 그렇게 1년후 그날이 왔다. 또... 


싸우면 서로 상처를 주는 말들을 하게 되는 법

너같은 딸은 안나았어야 하는데 낳았따는 둥, 없느니만 못하다는 둥, 나를 왜 낳았냐는 둥... 이런 말들이 오고 갔다. 8년이 넘는동안 그들의 싸움에 참견을 하지 않았다. 언어 이슈도 있었지만 부모 자식간의 싸움인데 내가 뭐하러 참견을 하냐는 생각이었다. 이때는 장모님 장인어른과 아내로 2:1 이기도 했고, 좀 심한듯 하여 따로 말씀을 나누자고 하고 두분과 대화를 시작했다. 

자식이 살인을 해도 부모는 자식편을 드는것이 보통인데 어떻게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그런 심한 말씀을 할 수 있냐고 했다. 지금보니 부모자식간의 싸움인데 오지랖이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네가 우리를 가르쳐 들어?"

우리가 네게는 불만이 없는 줄 아시나며...

그렇게 한시간을 넘게 내게 이야기 했고 나도 처음에는 몇마디 말대꾸 하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런 눈치 없는 넘...


그 1시간이 넘는 불만들을 듣고나서야 8년이 넘은 이제야 알게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아내의 성격때문에 그냥 흔한 자식과 부모간의 싸움인줄 알았던 것이다. 아내와 장인어른/장모님이 왜 그렇게 자주 싸웠는지... 아내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외국인이 내게 불만이 있던 것이었다. 


왜 야근을 하는지(야근도 불만이다.)

왜 회식을 하는지

집안일은 왜 하지 않는지(이건 내 잘못 맞다)

왜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지(공산당치하에서 일을 배당받아 일하신 분들이라 야근 하실일도 없었고, 아예 야근 개념이 없다)


그리고 본인들 딸이 외국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양육을 전적으로 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내가 중국인이었으면 우리 부모님도 아이를 봐주었을텐데 그런 얘기다.)


그러니까 항상 결론은 왜 외국인과 결혼을 했냐는 거다. 그러니까 네가 그런 고생을 하는 거라며 말이다. 그게 심지어 8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아내는 내게 욕을 할 수 있지만 부모님이 내게 뭐라고 하는건 참을 수 없는 성향이다. 그러다보니 항상 싸웠던 것이다. 나 같으면 엄마랑 아내 흉을 보고 아내에겐 전달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아내는 유들이가 없다. 그냥 뭐라 하면 들어주면 될일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부모님에게 화를 내니 장모님, 장인어른이 불만이 쌓인 것을 모르는 듯 했다. 


1시간 넘게 내게 퍼부우시고 장모님이 하신 말씀이 8년이 훌쩍 넘어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난 이제 할말 다했어. 최소한 속은 시원해~ "


다시 나로 돌아오면, 

그걸 모르고 원인제공자(?)인 나만 태평성대로 살았던 것이다. 옆에 있던 3명은 나로 인해 매주 싸웠고 말이다.


내 잘못이 있더라도 하여간 당시 정내미가 떨어졌다.


대화를 하지 않았다. 1년간 말이다.


다만 그분들은 모르신다. 왜냐면 내가 1년간 말을 안시켰다는 거지 물어보면 대답은 했다. 대답조차 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없을테니 말이다. 딱 묻는 말에 대답만 한 것이다. 정말 오시면 인사만 하고 단 한마디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1년후 기억력 나쁜 나의 성향상 그 기억들이 희미해졌고, 사실 알고보면 쪼잔하고 어리석을 뿐이지 또한 내가 본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신경을 쓰며 사시는 그분들이 더 힘들게 사신다는 것을 알았다. 잘 안보여도 되는 사람과 잘보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난 그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내가 지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장모님, 장인어른은 딸의 일을 도와주는건 일대로 많이 하고 인정을 못받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했다. 딸로부터든 나로부터든 말이다. 


딸이 초등학교 3학년때 또 한번 그러시더라~~ 음... 잘되었다 싶었다. 진짜 삼진아웃이다. 

그때는 한번의 큰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침묵을 했다. 말을 하면 더 오해가 생길수 있으니 절대 말을 섞지 않았다. 마침 책에서 읽은 구절도 생각이 났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내가 조언할 일 자체가 없고 현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언을 해주어도 소용이 없고, 그래서 결국 조언이란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내에게만 조용히 이야기 했다. 이젠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고 일이 있으면 내가 일찍 퇴근할 수 있으니 걱정할것이 없다고 했다. 또한 학교 버스가 단지 문앞까지 오니 단지 문 앞에서 집앞까지만 2분만 걸어가면 되는길이다. 익숙해질때까지는 일하는 이모님에게 한 일주일 정도만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을 부탁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5년이 흘렀다. 이젠 부딪칠일은 거의 없어졌다. 또 도와준다고 하신다. 연세도 있으시고 피곤하신데 이젠 더이상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이젠 정신도 차렸고 내가 복수할 차례다~ 


한국식으로 복수를 시작했다. 중국 아들딸들은 부모님에게 용돈을 주는 개념들이 거의 없다. 생일 때 선물사드리는 정도다.  

처음에는 생신때만 돈을 드렸다. 어색해 하셨지만 한국식이고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똑같이 한다고 설득을 하니 받기 시작하셨다. 장모님은 딸이 고생해서 번돈인데(난 고생안하나?) 그걸 어떻게 받냐며 안받으려고 하셨고, 장인어른은 나는 너의 장모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돈의 액수를 떠나서 뭔가 챙김을 받는게 좋으신거다. 


장모님의 엄마 아버지는 돌아가셔서 장인어른의 엄마, 아버지에게도 연말에 식사대접 해드리고 한국의 이쁜 봉투에 담아 용돈도 드렸다. 두분이 감격하신듯... 그 봉투를 한동안 만지작 거리신다. 의외의 상황인데 나쁘지 않으신거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내의 친할아버지 할머니는 총 2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 그리고 각각 자녀가 한명씩 있다. 아들딸이란 사람들은 그 할아버지 할머니 두분에게 도움만 받고 어떻게 하면 재산을 가져올 생각들만 있지 용돈을 드린 자녀도 용돈을 드린 손자,손녀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1년후 아내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집을 갔을때 그 봉투를 고이 잘 간직하신던 것을 보았다. 그 안의 돈도 사용을 안하신듯 했다. 하긴 두분 모두에게 충분한 연금이 나와서 돈이 필요하신 분들은 아니다. 이젠 마무리 단계다. 장모님, 장인어른 따로 격월로 용돈을 드린다. 매월드리려고 하다가 매월 만나지 못할때도 있다. 이체하는건 감흥이 없다. 그래서 안전하게 두달에 한번으로 정했다. 나는 사이가 좋아지는 것에 관심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사이는 좋아지는 듯 하다. 


또 다른 복수가 있을까? 

아직은 생각나는 다른 것은 없다. 생각나는 것있다면 제게 귀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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