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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Jan 20. 2020

입술이 가벼워서 마음이 따가워요.

엄지 손가락등이 베인 줄도 모르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엄지 손가락등이 베인 줄도 모르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손가락 관절이 접히는 주름 속 상처는 얼핏 볼 수록 덜 아파옵니다. 상처인지 주름인지 구별이 안 가 한참이 지났습니다.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꽤 오랜 시간 동안 알지 못했을 겁니다.



피났어요?

어디요?

여기.

아, 따가워.

갑자기?

그러게요.



알고 나면 더 아파옵니다. 갑자기 따가움을 느껴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자주 느끼겠지요. 손을 씻을 때마다 느끼고, 소독을 할 때마다 따가움이 더해지겠지요. 당신은 소독이 필요한 정도의 상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소독은 제쳐두고 연고를 발랐습니다. 혹시 몰라 밴드도 붙였습니다. 움직이다가 옷에 연고를 묻히긴 싫었으니까요.


당신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른쪽 귀 위에 난 상처, 왼쪽 눈썹에 난 상처, 입술 옆에 난 상처. 머리에 상처가 자주 났네요. 나의 말에 당신은 가볍게 웃습니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의 귀 이야기, 눈썹 이야기, 입술 이야기를 듣습니다. 갑자기 당신의 얼굴이 낯설어서 그냥 가볍게 웃었습니다. 가벼운 웃음이 오고 갈 때면 마음이 따가워집니다. 따끔. 피검사를 할 때처럼 잠깐 따갑고 맙니다. 가만히 눌러줘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마음이 따가워요.

손가락에 난 상처 때문에요?

아니요. 입술.

입술?

입술이 가벼워서 마음이 따가워요.



당신이 웃었습니다. 이번엔 어떤 웃음인지 모르겠습니다. 입술 옆의 상처가 늘어나는 웃음입니다. 입술보다 상처가 더 잘 보이는 그런 웃음입니다.



입술이 가벼워서 자꾸만 웃음이 나는 것 같아요.

그럼 어때요?

네?

웃음이 나면 좋지 않은가요?



당신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를 좋아한다는 말과는 다른 말일까요. 당신은 웃음을 좋아하나 봅니다. 이제 나는 내 입술 얘기를 합니다. 언제부터 입술이 가벼웠는지 얘기합니다. 대학교에 오자마자 입술이 가벼워졌어요. 마음은 매일 따갑고. 당신은 웃지 않았습니다. 나도 웃지 않았습니다. 입술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처음입니다.



입술이 무거워요.

마음은?

괜찮아요.

괜찮아요?

네.

입술은?

무거워요.

손가락은?

따가워요.



이제 손가락만 따갑습니다. 마음도 괜찮고 입술도 괜찮고. 당신 얼굴에  모든 상처가 흐려집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흐린 상처를 가진 당신과 함께  위를 걸었습니다. 괜찮은 걸까요 우리. 나의 말에 당신은 웃지 않았습니다. 나도 웃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괜찮고 입술이 괜찮으면 되는 걸까요. 그럼 손에  상처만 생각할  있는 여유를 갖게 될까요.


당신과 나는 눈 위를 계속 걸었습니다. 깊은 눈을 찾아다니며 걸었습니다. 신발에 눈이 묻어 쌓여갑니다. 하늘에서 새롭게 내려오지 않아도 발 주변으로 눈이 쌓입니다. 당신의 손을 잡아 봅니다. 엄지 손가락등에 난 상처가 따가워 반대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이번엔 당신의 손이 빠르게 움찔합니다. 상처가 났나요? 아니요. 괜찮아요. 당신의 괜찮은 손이 다시 내 손을 잡았습니다. 우린 계속해서 깊은 눈을 밟았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은 길을 걷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차갑게 식은 두 발의 발가락이 따가워집니다.



발이 따가워요.

이런.

발가락이 무거워서 따가워요.

차가워서요?

아니요. 무거워서요.



이제 우린 깊은 눈을 피해 걸었습니다. 얕은 눈 위로 걸었습니다. 모두가 걸어간 길에 당신과 나의 발자국이 새겨집니다. 아니 모두의 발자국이 새겨진 자리에 우리의 발자국이 숨겨집니다. 어떤 발자국이 당신의 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발자국이 나의 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얼핏 볼 수록 더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나의 손가락은 아직 함께 있습니다. 발가락이 따갑고 손가락도 따갑습니다. 깊은 눈을 피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도 깊은 눈을 피해 달립니다. 모두가 깊은 눈과 멀어집니다.


무서워요. 당신이 무서워합니다. 왜 그런지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유도 없이 손이 따가울 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어렸을 때 손바닥에 가시가 박힌 적이 있는데,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때와 비슷하게 따갑다고 합니다. 어떤 병원에 가도 괜찮다고만 했답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고 했습니다. 이제 갈 곳이 없어서 무섭답니다. 더 이상 이유를 찾을 곳이 없어서 무섭다고 합니다. 입술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당신의 눈을 봤습니다. 두 눈에 녹은 눈물이 조금씩 쌓였습니다. 당신이 손바닥을 바라봅니다. 나도 같은 곳을 봅니다. 적당히 혈기를 띄는 당신의 손바닥은 건강해 보입니다. 마음이 따가워집니다. 피검사를 할 때보다 더 오래 따가움이 느껴집니다. 입술이 무겁고 마음이 따가운 건 처음입니다.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괜찮다니요?

당신은 손이 따갑고, 나는 마음이 따가우니까.

그런데요?

이유가 하나가 아닌 일이 두 개나 있잖아요.

입술이 가벼워서라고 말했잖아요.

지금은 입술이 무겁고 마음이 따가운걸요.

그럼 이유가 없어진 거예요?

이유가 많아진 거죠.



당신이 다시 가볍게 웃습니다. 또 입술이 가벼워졌습니다. 마음은. 마음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상태로 버스는 달렸습니다. 눈이 없는 길을 달렸습니다. 더 오래가야 하는 당신을 버스에 두고 한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서로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당신도 언젠가 내릴 걸 알지만 어쩐지 두고 온 것 같습니다. 버스에. 깊은 눈을 피해.


따가운 손가락과 발가락과, 모르겠는 마음과 함께 발자국을 납깁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발자국이 새겨집니다. 얼핏 봐도 내 발자국인 걸 알겠습니다. 여전히 엄지 손가락등이 따갑고 발가락이 따갑고. 입술은 무겁고 마음은.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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