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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Jan 18. 2020

또 시, 잘 모르는

시가 좋아.

시가 좋아.

언제부터?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단호한 내 말에 너는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날고 있는 비둘기를 바라보는 척. 사실은 네가 기억 속을 헤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너를 다 아는 척.


우리는 여름에 만났다. 도서관에서 만났다고 하면 퍽 재미없게 들리겠지만. 우리의 첫 만남은 웃겼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다가 너와 만났지. 전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초점 없이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너와. 텀블러의 위치가 어긋나 정수기 물이 신발 위로 흐르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눈을 반만 감고 있던 너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 마실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니 네가 이 상황을 알아차리기를 기다렸다. 신발 속에 물이 들어가 양말까지 적셔질 때쯤, 너는 돌연 나를 쳐다봤다. 너의 발도 아니고 너의 텀블러도 아니고, 나를. 우린 각자의 동그랗게 커진 두 눈으로 서로를 봤다. 곧 웃기 시작했다. 도서관이라는 사실도 잊고 실컷 웃었다. 그러다 너를 좋아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언제든 맘 놓고 웃을 수 있었다. 너의 웃음이 언제나 더 커서 내 웃음을 걱정할 새가 없었다. 치아가 얼마나 보이는지 혓바닥이 제멋대로 움직이진 않는지. 함께 웃고 있으면 무엇도 상관이 없었다.


너도 그 날을 떠올리고 있겠지. 다시 너를 다 아는 척. 네가 보고 있던 비둘기를 봤다. 멀리서부터 날아온 비둘기가 가까이 내려와 앉았다. 구구. 비둘기는 정말 구구하며 울었다. 구구 구구. 한 마리가 더 내려와 앉았다. 구구구 구구. 우리가 평생 하나의 소리만 낼 수 있다면. 어땠을까? 그럼 우린 무슨 얘기를 어떻게 나눴을까. 상상했다. 마치 세상을 다 아는 척.



그래서 언제부터야?

응?

언제부터 시를 좋아했냐구.

기억 안 나?

아니.

근데 왜 망설여?

너는 안 좋아?

시?

나는 별로.



침묵. 단호한 너의 말에 이번엔 내가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날아온 비둘기만 보려고 애쓰면서. 구구 구구. 이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너도 나처럼 비둘기를 보기 시작했을까? 시 말고 좋아하는 거에 대해 생각할까? 단호해진 너를 다시 쳐다보기 어색해 비둘기만 봤다. 구 구구구. 세 마리의 비둘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어 다녔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앞으로 뒤로. 그들만의 약속이 있는 듯. 갑자기 웃음이 났다. 곧 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뭐가?

왜 웃어?

웃기잖아.

뭐가?

비둘기.

다행이다.

풉.



너는 뭐가 다행이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한 오랜 시간 덕분에 이제 설명 없이도 내 말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거야. 또 확신했다. 벤치에서 일어나 서로 헤어질 때까지 다시 묻지 않았으니까. 그 날 우린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었고 맛있는 커피도 같이 마셨다.



다행이야.



각자의 집으로 가려고 하는 순간 네가 말했다. 나는 시를 좋아하는데 너는 소설을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상했다.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되물었다.



뭐가 다행이야?



갈 곳을 못 찾는 내 질문에 너는 단 한 번도 웃지 않고 대답했다.


이제 그만 할 수 있겠어. 너는 또 시를 얘기할 거고 나는 다시 소설을 얘기할 걸 아니까. 우리 오래 만났는데 나는 여전히 시를 잘 모르고 너는 소설을 읽지 않잖아. 이제 그만하자구. 서로가 좋아하는 게 선명해서 다행이야. 드디어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야.



아.



나는 순식간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아’만 외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아. 그다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아. 아만 외치며 울었다. 너도 울었을까? 모르겠다. 아아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또 아아. 너는 한참을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아’만 외치며 눈물을 흘릴 동안. 너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아. 아아아. 하아아. 하아. 하. 내가 ‘하’를 말할 수 있게 되자마자 네가 말했다.



갈게. 잘 지내.



잘 지내는 게 뭘까. 나는 ‘아’ 아니면 ‘하’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지하철 통로 의자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적어도 이건 잘 지내는 게 아니야. 너를 너무도 몰랐어.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아. 아아. 하아. 하. 깊은 숨을 내 쉬면 다시 눈물이 흘렀다. 네가 울었는지 아닌지 보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씩 눈물이 그쳤다. 아아. 하아. 여전히 두 단어만 말하는 존재로 집으로 가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이제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언젠가 좋아하는 시가 생겼다며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아아. 아아아. 하아.


꿈에서 나는 ‘아하’라고만 말하는 존재가 되었다. 무언가 끊임없이 깨닫고 있는 듯.



아하, 아하,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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