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는 늘 불안을 품고 있었다

by 이랑

곧 현관 비밀번호 입력음이 들려왔다. 나는 허둥지둥 사진을 지갑에 밀어 넣고,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소파에 앉았다.


“나 왔어, 우리야.”

"왔어? “


내가 본 걸, 그에게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보지 못한 척 지나가야 하는 걸까.


그가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

“응.”


지난 시간 동안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건, 지갑 속 그 사진처럼- 여전히 언니였을까. 그래서 내 마음을 아무리 내밀어도, 그는 애써 외면했던 걸까.


딸칵,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그가 방에서 나왔다.


“쫌 괜찮아?”

“아, 응.”


그 사진을 본 이후, 나는 아빠에게 다녀왔다는 사실마저 기억 저편으로 밀어둔 채로 잊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떠셔?”

“뭐, 여전해-”

“괜찮아지셔야 할 텐데.”

“그러시겠지, 엄마를 위해서라도.”


그는 몇 초간 말없이 눈빛으로만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향했다.


“저녁 아직이지? 밥 먹자.”

“응.”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쪽에 차오르던 감정을 꾹 눌러 삼켰다. 냉장고를 열고 반찬을 꺼내는 손, 말없이 식탁에 앉는 자세, 밥솥을 열고 밥을 푸는 동작. 하나하나 익숙하고 조용했다. 지금 이 순간은, 그 평온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야, 밥 먹어.”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응, 고마워.”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떠보았지만, 밥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목구멍 중간쯤에서 멈춘 듯, 무언가 턱 막혀버린 느낌이었다. 시선이 자꾸만 식탁 위 지갑으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마치 그 안의 무언가가 다시 고개를 내밀 것처럼.


“할머님이랑은… 연락해?”

별 뜻 없는 질문이었다. 궁금하지도 않았으면서, 뭔가를 덮기 위해 꺼낸 말.


“가끔. 내가 연락하는 거 안 좋아하셔. 가끔 찾아가면, 본인 죽을 때나 오지 말라고 하셔. 어머님께 감사하지.”

“엄마도 모시는 게 아니라… 두 분이서 같이 사시는 거야. 할머님이 워낙 정정하시니까. “


억지로 웃었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웃었다.

잠깐의 정적.


“어디 다녀왔어? 지갑도 안 챙겨가고.”

나는 턱 끝으로 식탁 위를 가리켰다.


“아, 거기 두고 갔었네. 잃어버린 줄 알고 한참 찾았었는데.”


그는 무심히 지갑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밥을 퍼 먹었다. 그 와중에도, 내 속은 조용히 끓고 있었다.


왜. 왜 하필 언니였을까. 그 지갑 안에 넣을 수많은 것들 중에, 단 하나 남은 그 사진은 왜 하필, 봉선 언니였을까.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밥을 먹었고, 나는 같은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치 다른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 같았다. 이 고요한 식탁 위에서, 나 혼자만 흔들리고 있었다.


“재하야.”


소리 내 불렀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얹힌 손끝이 잠깐 멈췄다.


“그때 말이야.”

입술 끝에서 망설임이 맴돌다 결국 흘러나왔다. 말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였다. 사실, 입을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언제?”

“… 그날.”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그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방 안의 공기가, 마치 갑자기 식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숨도, 온도도. 우리가 더는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날. 그날에 다시, 발을 디뎠다.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가면서도, 속으로는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다고. 결국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외면할수록 더 깊어지는 상처였다고. 하지만 생각이 말보다 앞서지 못했다. 나는 또다시, 내 감정으로 그를 흔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니, 어쩌면 알고도.


“그때, 그 자리에 언니가 아니라 네가 있었어야 한다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이 닿는 순간, 공기 안쪽이 조용히 뒤틀렸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꺼풀 아래 긴장이 일렁이고, 턱선이 천천히 굳어졌다. 표정이 아니라, 안쪽 어딘가에서 조용히 문이 닫히는 느낌. 입술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숨을 삼키듯 짧은 정적이 흘렀다.


“우리야.”

짧고 단단한 한 마디. 그 이상은 말하지 말라는 경계. 낮은 음성, 더 낮은 울림. 그 말 안에서, 그날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깨진 유리 조각, 짧게 튄 비명, 그리고 모든 소리가 멈춘 뒤의 정적. 나는 그 한 마디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말은 이미 방향을 바꾼 뒤였다.


“…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지? 계속, 그 순간에 머물고 있는 거잖아. 너는.”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빛이 닿은 눈동자 아래, 오래 눌러둔 감정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번지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내 이름을 부른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더 낮았다. 그 안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무언가를 다시 확인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문장들. 하지만 그 모든 걸, 말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오늘따라 더 조급했다.


“네가 우리 집에 살지 않았던 이유, 부모님이 미안해하시는 걸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너 스스로가 미안했기 때문이었어.”


그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그러나 눈은 피하지 않았다. 그 조용한 고집이 나를 더 흔들었다. 내 안의 어떤 감정이 미세하게 부서졌고, 그 조각들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넌 항상 그 자리에 언니가 아니라, 네가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그 죄책감 때문에 내 옆에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무 감정도 꺼내지 못한 거야. 좋아한다고도, 싫다고도, 그 어떤 마음도 말하지 못했잖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짚고, 두 눈을 감았다. 그 작은 동작 안에 오랜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말 대신 삼킨 시간들, 꺼내지 못한 감정들이 그의 손끝에 쌓이는 듯했다.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낮아졌다. 숨이 얕아졌고, 내 말은 그 안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만하자.”


숨처럼 새어 나온 말이었다. 아주 작았지만, 방 안의 공기를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그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테이블 모서리를 세게 쳤고, 유리잔이 흔들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지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산산이 부서진 잔 조각이 바닥을 튀고, 침묵 속에 그 소음이 길게 잔향을 남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났다. 바닥 위 유리 파편이 맨발에 닿을까 봐, 그런 것도 잊은 채. 아니, 오히려 닿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아픈 편이 낫다고 느껴질 정도로, 서로의 말이 너무 아프게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너는 왜 항상 도망만 치는 거야? 뭐가 그렇게 힘든지는 알겠는데… 나도 힘들어.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어려운 거 알잖아.”


그는 말을 멈췄다. 한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눈이 붉었다. 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그 말도, 그 표정도 다 보고 싶었다. 끝까지.


“그만하자고 했잖아. 제발.”

“피하지 마.”

“ 넌, 도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데.”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이 고이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죄책감 때문에 네 옆에 있었다는 말? 그게 그렇게 듣고 싶어? 그래야 안심이 돼? 나를 그렇게까지 몰고 가야, 네 속이 좀 편해?”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주 깊고, 아주 무거운 숨이었다. 몸을 가누기 위해, 혹은 마지막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쉬는 호흡처럼. 그리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 알고는 있었는데.”

입술 끝에 잠시 맺힌 한숨이 떨어졌다.

“진짜, 끝까지 이기적이다. 너.”


그 말은 칼날 같았다. 단단했고, 차가웠고, 정확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맺혔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말은 결국 아무것도 넘기지 못한 채, 목구멍 어딘가에 남았다.


그는 더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내 옆을 지나 방 문을 열었다. 맨발로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걷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붙잡지 못했다. 바닥에 희미하게 번진 피가, 그가 흘리고 간 마음처럼 보였다.


형태를 가진 감정. 그의 안쪽이, 처음으로 내 눈앞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내 욕심이 또다시 그를 다치게 했다. 이해하고 싶었다고 믿었지만, 결국 나만 이해받고 싶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의 상처는 보지 않은 채, 내 억울함과 외로움만 꺼내 놓았다. 그 말이 얼마나 아플지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아프게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벼려진 감정은 그렇게 그를 찔렀고, 나는 그 끝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유리 조각을 하나하나 주웠다. 손끝이 찔릴 때마다, 파고드는 건 유리가 아니라 내 말이었다. 부서진 감정의 잔해가 손바닥에 고여 있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함께 먹던 그릇들을 씻고, 청소기를 돌렸다. 유리 가루는 잘 안 빨렸다. 몇 번을 돌렸다. 혹시 그가 다시 들어왔을 때, 다치지 않도록. 깨진 건 유리였지만, 무너진 건 딴 데 있었다. 그걸 그제야 알았다.


정리가 끝난 뒤, 현관을 나섰다. 불 꺼진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 닫는 소리가 조금 크게 울렸다. 그 안에 무언가가 눌려 있었다. 늦게 꺼냈던 말들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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