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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기 Jun 02. 2022

엄마들의 주방 한 조각

오래 쓰는 사람 3

결혼할 때 주방 살림을 새로 사지 않았다. ‘살림’이라는 게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고, 단출하게 시작하는 신혼이었으므로 예쁜 그릇 세트라던지 꼭 필요한 냄비 세트 같은 건 찾아보지도 둘러보지도 않았다. 필요한 대로 우리집에서 조금, 남편집에서 조금 나눠 받아 결혼 5년 차가 되는 이때까지 잘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릇과 냄비는 앞으로도 무리 없이 새로운 우리집에서 오래 쓰일 것이다.


엄마의 그릇

먼 도시의 신혼집으로 가기 전, 엄마의 그릇장에 쌓인 수많은 그릇 중 몇 개를 쏙쏙 골라 담았다. 아빠가 장남이고 친목회도 두 개나 부지런히 참석하고 있어서 손님치레가 많았다. 그만큼 그릇도 아주 많았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며 친척들도 부모님 친구들도 한 상 차려 대접할 일이 없어졌다. 자식들도 결혼으로 직장으로 나가 있으니 찬장을 가득 채운 그릇의 쓸모가 많이 줄었다. 그러던 참에 내가 새 살림을 시작하니 어쩌면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늘색 테두리에 작은 꽃들이 그려진 그릇은 클라우드 사진첩을 뒤지니 2012년에 아빠와 토스트를 해 먹은 사진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때도 익숙한 그릇이었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하늘색 테두리가 밝고 따듯한 느낌을 주고, 제비꽃과 메리골드 등 다양한 꽃이 그려져 있어 예쁘다.

엄마는 이 그릇 세트를 시내의 한국도자기 매장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택배 배송이 거의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 무거운 그릇 세트를 사 왔냐고 물으니, 한꺼번에 구입한 게 아니라 조금씩 사서 날랐다고. 아무래도 아빠 눈치가 보여서였을까? 생각도 잘 안 나는데 왜 자꾸 과거를 캐묻느냐는 엄마에게 그릇을 산 이유를 또 물어보니, ‘이 예쁜 그릇에 가족이 같이 음식을 담아 먹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라고 한다. 회사 일과 집안일, 세 자녀를 기르는 일, 대화가 잘 안 되는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일 등등 많은 힘든 일을 정신없이 쳐내던 시기였을 텐데, 엄마는 예쁜 그릇에 작은 여유나마 담아보고 싶었던 건 아니였을까.


어머님의 냄비

살림을 무척 잘하시는 시어머님은 당장 쓸 일이 많을 냄비를 챙겨 주셨다. 크기가 적당해 실용성 있는 냄비 두 개는 새것으로 다용도실 한켠에서 꺼내 주셨고, 하나는 어머님이 오래도록 잘 쓰고 계신 세트 중 가장 작은 것으로 건네주셨다. 아직도 같은 디자인으로 출시되고 있는 휘슬러 냄비이다. 빨강, 노랑, 검정색 동그란 무늬가 처음에는 투박해 보이는데, 볼수록 다정해지는 디자인이다. 국물을 따를 때 뒤로 흐르지 않고, 뚜껑이 높아 고구마를 찌기에 좋다.

어머님은 이 냄비 세트를 남편이 초등학생일 때, 그러니까 약 25년 전쯤 방문 판매로 구입하셨다 한다. 동네 어느 아주머니 댁에 사람들이 모이면, 판매하려는 냄비로 음식을 해서 맛보는 ‘시연’을 하고 구입하셨다는데, 나에게는 정말 새로운 구입 방식이었다. 이리저리 후기를 찾아보며 백화점에서 꼼꼼히 따지고 사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인 것 같다.

그 당시 돈으로도 세트에 백만 원이 넘었는데, 어머님은 한번 살 때 좋은 걸 사서 오래 쓰자는 마음으로 사셨다고. 과연 그 뜻대로 지금도 시댁에 가면 그때 산 압력밥솥에 밥을 해 주신다. 어머님은 내게 주신 냄비가 너무 작아서 손이 잘 가지 않았고, 라면 끓이는 정도로만 쓰셨다고 한다. 크기가 작아 기름을 적게 쓸 수 있으니, 가끔은 여기에 튀김을 하기도 하셨다. 나는 국이나 찌개를 끓여 2~3일도 먹는 냄비여서, 어머님의 살림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새로 만든 가정에서 익숙한 식탁을 맞이하는 일은 은은한 안정감을 준다. 된장국이 싱겁고 김치찌개가 이도 저도 아닌 맛이어도, 고기를 다 태우거나 생선이 덜 익어도, 괜찮다. 이런 신혼의 시행착오 끝에, 나도 누군가에게 능숙히 밥을 차려주고 함께 먹는 그 따뜻한 손길을 물려받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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