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바로 옆, 넓은 도로를 하나 건너면 나의 텃밭이 있다.
첫날은 텃밭 계약만 하려고 허술한 차림으로 갔다. 청바지에 반팔 티를 입고, 새하얀 런닝화를 신었다. 모자를 쓸까 고민하다 다시 걸어 두고, 미세먼지 마스크를 챙겨 썼다.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가벼운 마음만 에코백에 넣어 달랑달랑 들고 텃밭을 빌려준다는 농장으로 향했다.
도롯가에서 멀찌감치 보니, 농장은 생각보다 푸르렀고, 아늑하게 길에서 벗어나 있다. 뒤로는 작은 산이 올막졸막한 텃밭들을 감싸 안듯 펼쳐졌다.
도롯가에서 백 미터 정도 걸어 들어와,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면 검은 천막이 보인다는, 농장 주인아저씨의 애매한 설명을 따라 길을 찾았다. 시골길은 아무렇게나 굽어들고, 객관적인 표지판이 없어서 길을 설명하는 사람과 알아듣는 사람 간에 소통 차이가 나는 점이 재미있다.
영국에서 우프*를 할 때, 농장을 찾아오는 길이나 농장 근처 놀러 갈 만한 곳을 설명해 놓은 안내문도 이와 마찬가지로 알 듯 말 듯했다. 영어에 서툴러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꼭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안내문은 'footpath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작은 개울이 나오는데, 이 개울을 건너 오르막 길을 오르면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이중 맨 오른쪽 좁은 길로 가라.'라는 식이다. 명확한 설명처럼 보이지만, 막상 길 위에 서면 나의 공간 인식과 안내문을 쓴 사람의 공간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footpath라고 적힌 표지판은 수풀이 무성하거나, 드넓은 목장을 가로지르거나, 울타리처럼 생긴 나무 문을 넘어야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내게는 도무지 길로 보이지 않는 곳을 버젓이 가리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적이 드문 footpath를 헤매며 살아 돌아가기 위한 길치의 모험을 펼쳤다.
다행히 footpath 정도로 막막한 길은 아니어서, 수월하게 농장 주인아저씨를 만났다. 얼굴을 맞대니 대화가 전화상으로 보다 자연스럽게 흘렀다. 역시 전화는 사람을 조금 사무적으로 만드나 보다. 전날 전화로 '텃밭 진행 절차는 어떻게 되죠?'라고 물었던 게 생각 나, 스스로 조금 민망해졌다.
마침 아저씨가 미리 준비해 놓은 밭이 있어서 퇴비와 비료값을 조금 더 내고 밭을 빌렸다. 간단한 형식이지만 아저씨가 '원서'라고 말한 종이에 인적사항을 쓰고 사인을 했다. 원서를 썼으니 나는 입학을 하게 된 건가? 어디에..? 퇴사 후, 지난 2주간 소속이 없었는데, 낯선 지역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소속이 생겼다.
기대했던 것보다 텃밭 운영과 분양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텃밭 이름을 짓고 갔는데, 원서를 쓰니 농장 주인아저씨가 깔끔하게 코팅된 종이 여러 개를 건네며 텃밭 이름을 정하라고 했다. 새싹농장, 녹색농장, 초록농장... 등 꽤 마음에 드는 이름이 많았다. 나는 평소처럼 망설이다가 '자연농장'이라 쓰인 코팅지를 골랐다.
아저씨는 내일 비가 오니 일단 밭에 비닐을 먼저 씌워 두자고 했다. 비닐을 쓸 생각이 없다고 말했더니, 그럼 너무 농사가 힘들다고 한다. 아직 초보이니, 일단 반만 아저씨 말에 따르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작업을 하기 위해 아저씨가 알려준 근처 종묘상에 가 장화와 호미, 장갑을 샀다. 지난 며칠 동안 종묘상을 인터넷에 검색하고, 이미 없어진 종묘상을 네비로 찍고 찾아가 허탕을 쳤는데, 바로 집 근처에 종묘상이 있었다. 포털사이트에 등록하지 않았는지 인터넷으로 검색되지는 않는 곳이었다.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을 현실보다 더 신뢰하고 살지만, 인터넷이 무용지물인 상황을 살면서 점점 더 자주 맞닥뜨린다.
종묘상에 들르느라 생각지 못한 시간에 밭을 일구게 되었다. 해가 중천에 뜬 12시쯤부터 말이다. 조금 막막했지만, 장화를 신고 밭을 밟으니 오랜만에 느끼는 흙의 촉감에 기쁨이 차올랐다. 게다가 내가 종묘상에 다녀온 사이, 아저씨가 '자연농장' 코팅지가 붙은 나무 팻말을 텃밭 앞에 세워 놓아 마음이 더 들떴다.
영국에서는 레이크라고 했던 쇠스랑으로 밭을 평평하게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어젯밤 집에서 공부한 텃밭 대백과 책에 따르면 두둑을 만드는 일이다. 흙을 뒤엎어 올리고, 돌이나 이물질을 골라내며 고르게 편다. 아주 오랜만에 우리 집 반만 한, 농사가 서툰 사람에게는 약간 막막한 넓이의 밭을 만드려니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둑을 완성한 다음, 전체 밭의 반 정도에 검은 비닐 롤을 굴려 비닐을 깔았다. 비닐을 잘 펼친 다음, 가장자리를 발로 살짝 밟아 가며 흙을 덮어 땅에 고정했다. 간단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밭 중간 지점에 진흙탕이 있어서 장화가 아주 엉망진창으로 빠졌다. 게다가 흙이 아주 질척거려 뜻대로 비닐 위에 잘 덮이지 않았다. 진척 없이 밭 고랑에서 버둥거리고 있는데, 아저씨가 가만히 철사 핀을 건넸다. 이 핀을 흙이 허술하게 덮인 곳에 찔러 박으니 비닐이 간단히 고정됐다.
대강의 밭 모양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무엇을 심을지 고민해야 한다.
잘하지도, 왜 이리 늘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지만
허리를 굽혀 밭을 일구고, 잡초를 한없이 뽑고, 자주 찾아가 물을 주고, 잎과 줄기를 어루만지고, 꽃을 발견하고, 열매를 기다려 따는 일을
드디어 소소하게 시작했다.
*WWOOF: 유기농가 및 친환경적인 삶을 추구하는 곳에서 하루에 4~6시간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