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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경 Nov 13. 2024

아무튼 이불

빈둥빈둥_문정희

아무튼, 이불


아무튼, 시리즈라는 책을 한동안 사서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무튼, 떡볶이

아무튼, 식물

아무튼, 문구

아무튼, 서재

아무튼, 언니

아무튼, 메모

아무튼, 여름까지 아무튼 시리즈는 무궁무진했다.

나올 때마다 사서 읽은 책 목록이다. 내가 좋아하는

목록이기도 하다.


만약 아무튼 시리즈를 독자가 아닌 작가로 쓰게 된다면 아무튼, 이불을 쓰고 싶다고 자주 생각했다.

이불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소재다.


한 집에 10년 동안 살다가 이사를 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다양한 이불이 우리 집과 함께 동거했다.


다양한 이불을 사용해 보면 이불마다 감촉도 다르며 덮었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도 다르다. 이불무늬에 따라 시각효과도 있어 집안 분위기를 사뭇 다르게 만든다.


광목은 커튼으로 접했다. 광목에 꽃무늬가 새겨진 커튼은 신혼집 거실에 달렸었다.

프릴 레이스가 달린 이불은 광목커튼과 햇살에 비치는 창을 뚫고 들어와 침대 위 이불이랑 한 몸을 이루었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햇살을 뚫고 들어오는 이불속에서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은 모두 이불을 사랑하는 것이다.


극세사이불이나 자수가 들어간 이불까지 이불에 들어간 솜이 목화솜이냐 일반 마이크로솜이냐에 따라 보온효과도 다르다. 차렵이불과 린넨소재 모달소재까지 이불마다 감촉도 다르고 몸에 감기는 느낌도 다르다.




계절마다 소재, 촉감, 두께, 크기 각각 달라진다. 침대 바닥에 까는 요부터 덮는 이불 여름에 필요한 것부터 아기가 덮은 이불까지 우리 집은 식구가 아이 여섯 어른 둘 총 여덟 명의 대가족이라 각자 이불을 덮는다고 해도 벌써 8개인데 거기다 까는 이불도 하나씩 이면 겨울이불까지 차곡차곡 세어보니 정말 많아진다.



따뜻한 이불 속에 숨어 들어가 아이들과 살을 부비며 놀다 보면 쌔근쌔근 잠든 아기를 슬며시 재우고 슬쩍 빠져 나오며 살포시 덮어줘도

어느덧 발로 차버린 이불을 보며 웃음이 배어 나오는

것이다. 이불은 잠든 시간의 친구같은 것이다.




잠을 잘 때 이불이 쾌적하고 보송하면 삶의 질도 향상된다. 잠은 모든 삶의 기본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주부로 20년을 넘게 지내보니

모든 것이 기본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상생활에 배어 있는 이불, 의자, 실내화, 쓰레기통 등등 모두 하루에 한 번은 우리의 삶에 쓰임에 관한 물건들이 무엇이냐에 따라 건강하게 우리의 마음과 삶을 단정하게 만든다.


그동안 내 손으로 빨고 널었던 오래된

이불을 20채 넘게 버리면서 어쩌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발전이나 성공 더 나은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 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노동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노동 후에 오롯이 나의 지친 몸을 감싸 안아 잠으로 안내하는 달콤한 휴식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시시때때로 먼 친척이나 자식으로부터 들어오던 예단이불을 바닥에 깔고 뒹굴뒹굴 거리며 놀던 추억이 좋아서 내가 이불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지금껏 살아오기까지 얼마나 다양한 무늬와 촉감과 무게를 가진 이불들을 덮고 살았는지

이불과의 조우한 기록들을 하나하나 펼쳐보고 싶다.



맞아, 그 이불은 감기가 걸려 콜록콜록하던 날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식은땀 흘리며 잠이 들기도 했었지

맞아, 그 이불은 한 겨울 아이들과 모두 들어가 서로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치기도 했었지

맞아, 그 이불은 갓 태어난 아기의 첫 보금자리기도 했었지


계절마다 우리 가족을 끈끈이 이어주던 누군가의 지친 마음까지 위로하고 달래주던 빈둥거림을 허용하는 공간에는 늘 이불이 있었다.

이불은 나의 철학이다.


빈둥빈둥

문정희


"나를 방목한다

빈둥빈둥

내가 사랑하는 어슬렁어슬렁이다

모래와 모래 사이

창조가 넝쿨처럼 뻗쳐 오는 것도

버겁고 시들해서

속도와 움직임 다 버린다

그냥 햇살

그냥 해찰이다

시간의 독재가 다그치는 교훈들과 강요

흔한 정보와 움직임에 대한 예찬

의미와 의미로 덧없는

생산과 숫자에 나는 멍들었다

잠언들의 경고와 속삭임을 벗어나

채찍 앞에 무릎을 휘청이는 나

일어서라, 파이팅! 파이팅!

일어서서 어디로 가란 말인가

나는 모르겠다, 몰라도 좋다

피 묻은 마우스를 뱉고 가죽 글러브를 벗고

빈둥빈둥 햇살 속으로

이제 벌거벗은 너만 오면 된다

사과만 나눠 먹으면

통쾌하게 에덴에 당도할 것이다."


아무튼, 이불이다.


#아무튼 이불

#아무튼시리즈

#문정희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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