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영화제
왕릉영화제
서울 둘레 길 시작은 한양 사람들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어주던 지름길이거나 또는 집 주변 텃밭, 마을 뒷산을 가기 위하여 다니던 산길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직 사람의 발로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소로 길이다. 산업화 도시화 미명 아래 소로 길이 사라져도 전혀 관심 없이 한동안 잘 지내는가 싶더니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도시의 사람들이 삶(건강)의 숨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둘레 길의 시작이다.
서울 둘레길 자원봉사 아카데미 봉사 실적이 40포인트를 넘으면 둘레길 상징인 모자를 기념품으로 준다. 모자를 받으러 서울 둘레길 센터인 창포원에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미아사거리에서 우연히 왕릉영화제 현수막을 스치듯 잠깐 마주했다. 그 순간이 인연이 되어 왕릉영화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왕릉영화제는 주체가 성북구 노원구 구리시 남양주가 공동 주체하고 주관은 성북문화재단, 왕릉영화제추진단 두 기관이다. 중요한 시행은 아리랑시네센터이다. 성북구에는 정릉 의릉, 노원구에는 태릉 강릉, 구리시에는 동구릉, 남양주시에는 광릉 사릉 홍릉 유릉 등 왕릉이 있다. 능(陵)에 얽힌 역사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그대로 아니면 후손의 시각이 가미된 이야기로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건조한 생활을 하는 시민들에게 ‘긍정’이라는 순기능(順機能)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길라잡이 역활을 할 ‘왕릉 영화제’는 올해 쉽지 않은 첫발을 내디뎠다.
왕릉영화제는 2017.12.7.(목) - 12.9.(토)까지 진행되었다. 12.7.(목)은 남한산성 장희빈 사도, 12.8.(금)은 남한산성 황혼의 검객, 12.9.(토)은 관상 연산군 폭군연산으로 시민들을 초대했다. 정중한 초대에도 불구하고 개인 사정으로 참여가 여의치 않았으나 다행히도 12.8.(금) ‘황혼의 검객’과는 궁합이 맞아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 액션 영화의 ‘대부’ 정창화 감독은 암울했던 60년대에 활력(活力)을 불러일으키고자 액션의 정점인 절제된 무술 영화를 구사하였고 그 결과 동적인 무술이 마치 승무(僧舞) 춤사위로 몰입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높은 수준의 영화를 만들었다.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당시에는 흥행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정적 휴식이 필요한 현재의 관객에게는 무술 영화의 표본인 ‘황혼의 검객’이 신선하고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특히 남양주에 위치한 홍릉과 유릉에서 두(남궁원, 허장강) 검객의 결투 장면은 한국의 전통적인 우아함과 검(劒)에서 우러나오는 속도감을 조화롭게 구현해 낸 명장면으로 이 영화의 정점(頂点)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영화가 대부분 세트 촬영인 점을 고려하면 당시는 영화 산업 환경이 열악한 관계로 현장 촬영이 주(主)를 이루었다. 따라서 황혼의 검객에서 나오는 역사적 유적들의 생생한 화면은 문화적 보존가치가 있음은 물론이고 관객에게도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행운의 보너스를 주었다.
대부분 사극(史劇) 영화가 역사의 사실에 바탕을 두고 거기에 감독의 감각(흥미)이 가미되는 모양새라면 황혼의 검객에서는 반대로 감독의 구상과 연출이 주(主)가 되고 역사의 사실이 가볍게 시대의 배경으로만 처리되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영화 상영 종료 후, 이종승 영화 평론가와 함께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쏟아지는 황혼의 검객에 대한 세세(細細)한 질문과 답변은 마치 원석을 진정한 보석으로 만드는 과정과 너무 흡사했다. 지금도 궁금하지만 대화 중에 한양을 왜 서울로 말했느냐에 질문은 관객과 평론가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영화제 뒤풀이의 백미(白眉)였다.
'사라지기 전에 경험해야 할 마지막 목욕탕'에 이어 60년대 흑백 영화 ‘황혼의 검객’까지 연이은 추억의 회춘 보약을 먹을 수 있는 서울 성북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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