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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각로 강성길 Jan 17. 2018

돗토리로 가는 주막 같은 동해 역

타보자!  DBS 크로즈 훼리 호


 9시 34분 청량리 출발 1633호, 무궁화 열차는 동해항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다. 

무궁화 열차지만 특실도 있었다. 초콜릿색 바탕에 추상적인 꽃무늬가 있는 좌석에 하얀 머리 받침 덮개가 기본이다. 특실은 넓은 좌석 간 거리, 다리받침 기능 그리고 조그만 접이식 테이블이 전부인 아주 소박한 특혜(特惠)였다. 그러나 5시간이나 걸리는 기차여행이다 보니 동해 역에 가까워질수록 특실의 비중은 커지면서 간이침대 역할까지 무난하게 감당하는 아주 기특한 녀석이었다. 

무궁화 특실



 청량리를 출발하여 덕소까지는 차창에 그려지는 풍경을 블랙박스처럼 빠짐없이 수집하는가 싶더니 그만 나도 모르게 깜박 졸았다. 감미로운 우리 가락이 여객 내에 정처 없이 흘러 다니면서 원주 역이 가까워졌다고 귓바퀴를 간지럽게 하는 통에 졸음도 가시 었다. 다시 차창에 그려지는 눈 덮인 치악산 설경은 너무나 순간적인 신비이기에  아쉬운 즐거움으로 남겨두었다. 이럴 때는 마주 오는 기차를 위하여 잠시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할 수 있는 무궁화 열차이기 들뜬 기분은 지속되었다. 

차창에 치악산

 빛이 연출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풍경을 놓치고서야 비로소 열차 내 풍경이 들어온다. 기차를 타면 항상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다. 오늘은 그 작은 소망(所望)이 이루어졌다. 옆자리가 덩그러니 비어있었다. 갑자기 34평 아파트를 인터넷 주문했는데 느닷없이 42평의 아파트가 배송되어 온 느낌, 기분마저 넉넉해진다. 그래서 보란 듯이 가방도 던져보고, 주전부리도 어지럽게 늘어놓고 해도 빈 공간이 아직도 있다. 


 대각선으로는 갓 말문이 뜨인 아기와 엄마가 함께 타고 있었고 통로 건너 옆에는 나이 든 군인 아저씨가 타고 있다. 차 안이 조용하기 때문에 아이와 엄마 대화 소리는 물론 군인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받는 전화소리조차도 모든 승객이 공유하게 된다. 기차 안은 눈 덮은 마을조차도 차창으로 보면 소박하고 정겨운 산수화 속 시골마을로 만드는 괴물 같은 존재인데 하물며 기차 안 풍경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포근포근하였다. 종종 무단으로 들어오는 진노랑 햇빛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가다 보면 야산을 레게머리같이 해 놓은 간벌이 흰 눈을 더욱더 선명하게 하고 산등성이 터줏대감 격인 소나무 군들 머리 위로는 햇살이 눈부시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밖의 세상은 목가적이고 아늑한 풍경이다. 혹시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차 안 시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본다. 눈 위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촌노 조차도 진경산수화 속의 소재로 바꿔버리는 것이 바로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 풍경인 것이다. 기차가 터널로 들어서면 암흑의 수렁으로 깊게 빠져드는 느낌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하게 살아있다는 감(感)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 또한 기차 안에서 일 것이다.    


 영월하면 떠오르는 동강의 모습은 고사하고 비슷한 도랑조차 보이질 않았다. 연이어 보아온 산과 마을 그리고 전기 줄 위 까마귀 참새가 평온하게 졸고 있으며 사람 사는 것은 분명한데 그동안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이 우리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 부러움 반 체념 반이거나 아니면 매일 어딜 저렇게 가냐 궁금해하면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나도 무슨 생각을 하며 바라볼까 궁금하다. 


 기차는 영월을 지나면서 자꾸 깊은 산속으로 찾아간다. 골짜기만 찾아간다. 물이 돌 틈 사이를 비집고 흐르고 무성한 잿빛 나뭇가지만이 바람을 맞이하는 이곳이 오지입니다 라고 안내할 뿐이다.  물가 노란 갈대숲이 지금이 겨울이고 나 아직 살아 있으며 바람의 힘을 빌려서 평창 동계올림픽 인사로 ‘아리아리’ 한다. 느릿하게 잘도 가고 있는 기차는 어느 것 하나에도 정을 주지 않는다. 나무 밑 둥만 이렇게 오래 계속 보는 것도 기차여행만이 주는 별난 볼거리이다. 앙상한 잿빛 가지로 단장한 12월의 산은 빈 듯이 채워져 있다. 


 석항 간이역에는 오래된 객차가 2층으로 쌓여있다. 투박한 박물관 같은데 얼핏 보아서는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객차의 제2의 인생임에는 틀림없다. 배경으로 산수화처럼 단정한 나무 머리를 하고 있는 석항 역 뒷산이 여느 산과 달리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나를, 아니면 동화 속 나무꾼을 그리워한 것일까? 아마도 함박눈이 지난가을 고독을 찾아 떠난 나뭇잎과 은밀히 조우(朝雨)할 수 있도록 산은 함박눈을 기다린 것 같다. 


 좌(左) 창은 눈이 없는 빈 밭으로 보이고 우(右) 창은 눈이 소북이 쌓인 비탈 밭의 풍경이다. 우리 기차는 같은 지역을 두 곳으로 갈라놓고 지나간다. 무심하게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바로 지우려고 다시 터널로 들어가 버린다. 벼룩의 간 정도의 정도 없다. 간이역 자미원에서 다음이 민둥산 역임을 작은 글씨로 살짝 귀띔해 준다.


 기차는 산허리쯤에서 달리기 때문에 한번 계곡을 보여주면 계곡 전경(全景)을 고스란히 깊게 보여준다. 이 계곡의 산 또한 높다는 것을 기적소리로 알려준다. 산속 깊숙이 너무 들어왔다. 이런 곳에 기차역이 있다니 기차는 두려움을 청량리에 놓고 온 것 같다. 깊은 계곡을 터널로 숨겨놓고 다시 조용한 마을 앞에 기차는 가지런히 섰다. 이곳에서 내리는 승객이 한 사람뿐 마치 그 승객만을 위한 민둥산 역이 되어버렸다. 


 간간이 들리는 애기의 응얼거리는 소리만이 이곳이 기차 안 속세임을 알려준다. 기차는 정차할 때에는 알아채도 출발은 도둑과 같아 알아채기가 어렵다. 출발하는 것 같더니 바로 사북역이 가까워졌음을 국악이 알려준다.  1년 치 국악(國樂) 듣는 횟수를 이번 기차여행에서 다 채우는듯하다. 사북 철로길 주변에는 새로 짓는 아파트가 눈에 띈다. 승객도 제법 많이 내렸다. 도시풍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차하는 것이 분명 이곳에는 무엇인가 있다. 무슨 모텔이 그리 많은지 그 연유와 맥을 같이하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모텔 간판으로 시작해서 모텔 건물로 기차는 사북을 벗어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기차는 터널로 들어가려고 한다. 새로운 풍경을 틀림없이 준비할 것이다. 연화산(1,171m)이 보인다. 연화산은 넓게 보면 태백산맥이 아니든가. 드디어 태백산맥을 넘기 위해 루프 식 기술을 동원했다. 연화산 아래 동백산 역을 기점으로 루프는 시작된다. 터널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낮은 동백산 역을 아래에 두고 동백산 역의 꼭대기인 연화산을 넘은 것이다. 


 새로운 세상, 동해를 잉태하기 위해 아주 긴 터널이 필요했다. 긴 터널 칠흑의 세계가 끝나는 곳이 신천지 관동지방이다. 산과 바다가 지금 이 곳에서 교체를 해야 한다.  이곳을 엄밀히 말하자면 돌고 있는데 앞으로 가는 느낌은 무엇일까? 어찌 보면 우리도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와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앞으로만 가는 감정만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언제 인지할지 모르겠다. 똑바로 가면서  돌아서 태백산맥을 넘는 방식인 것이다. 


 긴 터널 끝이 도계 역이다. 태백산맥 아래 도계만 왔을 뿐인데 느낌은 전혀 다르다. 세상이 바뀐 흔적은 차창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조금 전까지 바라보는 차창으로 햇빛이 들어왔지만 지금은 반대편 차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다. 숨 쉬는 공기에서도 약간의 바다 내음이 나는 것 같다. 기차의 숨소리도 내려가는 느낌으로 새근거리고 있다. 태백산맥을 넘기 전에는 하천(河川)은 기차와 서로 투덜대며 엇갈려 흘렀지만 지금은 속삭이며 같은 방향으로 따라 흐른다. 천(川) 주변에 제법 가지런히 정리된 소박한 들판도 보이고 집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위와 아래로 촘촘히 가옥(家屋)들이 쌓여 있는 산업적인 마을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적당히 펼쳐진 들판에 여기저기 퍼진 농가들로 목가적인 동네를 이루고 있다.


  엄마가 아기에게 두툼한 잠바를 입힌다. 머잖아 동해 역인가 보다. 아마도 역과 역 사이가 가장 길었던 구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2:30분인데 이미 해는 저무는 풍경이 연출된다. 이곳 지금의 관동 광경이다. 외투를 입었다고 해서 반드시 내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일찍 입은 것뿐인데 바로 내릴 것이라고 바로 동해역이라고 오해를 한 것이다. 지루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서야 동해 역에 닿을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한 단면이나 행동만 보고 일방적으로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아기 일행과 나는 이렇게 동해 역까지 왔다. 아기는 아빠 품으로, 나는 일본 돗토리 현(県)을 가기 위하여!

DBS  선상에서 바라보는 돗토리 현(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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