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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Nov 04. 2021

4년 만의 한국 방문을 마무리하며

너무 감사하게도 제 안부를 궁금해하는 분들에게

 아무런 글을 남기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물리적인 바쁨도 한몫하였지만 실은 글을 빚어낼 여유를 품지 못하였음이 더 큰 이유였음을 안다. 별로 써놓은 것도 없는 공간이었는데 글이 올라오지 않아 안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어 무척 감사한 마음이었다. (안녕하시지요? :))


 4년 만의 한국 방문


 COVID-19으로 인해 큰 희망과 꿈을 품고 입사했던 회사에서 밀려난 바로 그때는, 전 세계가 이 코로나의 파급력에 대해 큰 두려움과 물음표를 동시에 갖고 있던 때였다. 일시정지에 가까웠던 그 시점에서 운신의 폭을 알지 못해 무리수를 둘 수 없었던 나는 안전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전 직장으로 돌아가게 됐던 것이다. 물류업계는 코로나 난리통에 일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져 일을 하는 내내 업무 스트레스는 과중되어만 갔다. 개인의 사정도 그다지 녹록지 못하였으니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일터에서 감정조절을 제대로 못하기도 했다. 24/7 돌아가는 기계였다. 쉬고 싶었다.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계속해서 한국에 다녀올 수 있을지 각을 재고 있었는데, 마침 접종을 완료한 재외국민이라면 직계가족을 방문하는 경우, 자가격리를 면제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것이 7월 즈음이었고 즉각 9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렇게 나는 4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출국 전날을 퇴사일로 잡은지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짐을 싸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 좌석 스크린을 통해 여정 정보를 띄워보니 대한민국 영토가 눈에 들어왔다. 인천공항에서 강화된 검역절차와 각종 앱 설치 등등 요구되는 절차를 모두 마무리하고 짐을 찾아 입국장으로 나오니 아직 어둑한 새벽녘이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는 경우, 보통 표기된 도착시간보다 빠르게 착륙하기도 한다는 것조차 새카맣게 잊고 있었으니 이제는 어디 가서 예전에 비행했었다는 말도 못 하겠다.


 4년의 시간이 만든 변화들은 막상 도착하고 나니 꽤나 큰 것이었다. 주민등록증도 운전면허증도 하나도 안 챙기고, 한국의 은행 계좌는 모두 휴면된 상태, 가지고 있던 체크카드도 만료였다. 설상가상 출국 전 갖고 있던 미국 신용카드에 문제가 생겨 재발급 요청을 해뒀는데 출국 전날까지 도착하지 않아 제대로 망한 셈이었다. (출국 다음날 미국 집에 도착했다고) 지불 수단이 하나도 없는 상태. 홀로 '바보가 다 되었네' 되뇌며 새벽의 찬 공기를 마셨다. 가끔 한국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 걸지 궁금했는데 아직까지도 뼛속 한국인이라 그런지 딱히 이렇다 할 냄새가 규정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마중 나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4년 만에 마주한 부모님의 얼굴


 횡단보도 너머에서 아버지가 걸어오고 계셨다. 세월이 내린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눈물 맺힌 두 눈이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4년 만이었다.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반가움에 두 팔 벌린 엄마를 꼬옥 안았다. 자세히 뜯어보려 마주한 엄마의 얼굴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많이 늙었고, 집 안 곳곳에도 4년 치만큼의 낡음이 눈에 들어왔다. 4년 전 한국을 떠날 때에는 설마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야속했다.


 PLAY - PAUSE - RESUME


 4년의 시간을 부모님 얼굴에서 깊이 체감했지만, 한국에서 내가 이어온 과거의 시간들은 마치 멈췄다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가속도를 받으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한없이 뒹굴거림이 허용되는 곳, 엄마의 따뜻한 밥과 맛있는 반찬으로 세 끼를 먹을 수 있는 곳, 내 과거의 흔적이 잔잔히 내려앉은 곳, 삶의 걱정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민생활이 길었던 주변분들은, 엄마가 살아계시면 고국 방문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고 하셨다. 그러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영원한 이방인이 된다고, 한국에 가도 그냥 '객()'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얻고자 이렇게도 밖으로 돌기만 하는 삶을 선택했는지 후회가 될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오롯이 부모님 때문이다. 성장을 곁에서 지켜봐 주고 내 여린 구석을 품어주셨던 부모님이 이제는 자꾸만 자꾸만 늙어가시고 자꾸만 자꾸만 약해지신다. 더구나 엄마는 뇌종양 투병으로 10년째 각종 병명들을 보태만 가고 계셔서 거꾸로 세월에 드러나는 부모의 여린 구석을 조금도 살피지 못하는 스스로에 자책감이 든다. 하지만 어쩐지 중간에 끼고 만 것 같은 상황을 자초했으니 결국 내 업보일 테다.


 부모님의 배웅을 받고, 출국 게이트에 앉아 이 글을 쓰며 눈물 콧물을 잔뜩 흘리고 있는 참이다. 한국에 돌아오며 재생 버튼이 다시 눌렸듯, 미국에 가 그곳의 삶에 재생 버튼을 누를 차례다. 마치 투트랙 같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 어디에도 안정을 얻지 못해서일까 묻게 되지만.


 CATCH UP


 한국에서 지인들을 만나는 것조차 모두 4년여+의 월만이었다.


 마이클 앱티드(Michael Apted) 감독이 제작한 '7-UP'이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쇼가 있다. 7살짜리 영국 어린이들을 매 7년마다 인터뷰하는 내용인데, 이번 방문이 꼭 내가 그 다큐 감독이 된 것 같았다.


"A group of British children aged 7 from widely ranging backgrounds are interviewed about a range of subjects."


 본의 아니게, 짧은 기간 동안 소속이 다방면으로 휙휙 바뀌었던 탓에, 지인들의 프로파일이 꽤 다양한 편에 속한다. 학교의 틀을 벗어나 회사 생활하며, 비행하며 알게 된, 미국에서 알게 된 등등의 사람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묻고 그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듣고 지금은 어떤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각기 다른 부류 그리고 각기 다른 삶의 궤적에 놓인 사람들이 주는 독특한 에너지가 전해진다.


 또다시 다음 장막을 준비하여 가득가득한 꿈을 품어가는 친구들도 있고,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닥뜨려 혼란해하는 친구들도 있고, 삶의 안정기에 접어들어 그 편안함이 느껴지는 친구들도 있고, 결혼을 앞둔 친구도 있고, 임신을 하여 출산을 앞둔 설렘을 가진 친구들도 있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대단한 친구도 있고.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 뿜어내는 에너지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다음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각각의 친구들은 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나는 또 어떤 이야기를 갖고 나타나게 될까.


 TURNING POINT


 지금까지 어쨌든 애써 살아왔듯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테지만, 나에게는 이 방문이 무척이나 필요했었다.


 약간의 쉼표와 함께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푹 쉬는 회복의 시간. 그리고 이 다음이란 것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시간. 그러한 여유.


 여유가 조금도 없었던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저 울컥함만이 치밀어 오른다. 이번에 쉬면서 건강검진 등을 받아보니 건강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것도 무척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을 앓다 간 것은 비밀이 아닌 것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두바이를 마무리하고 한국에 한 달여 있었던 때도, 미국에서 잠시 한국에 온 지금도 쉴 때마다 꼭 이렇게 크게 아프다.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무척 와닿는 요즘인데, 몸도 마음도 바닥을 쳤으니 치고 올라올 일만 남은 것 같다.


 돌아간다. 미국으로.


 다음에 한국을 방문하는 시기는 부디 4년보다는 짧았으면. 엄마아빠가 더 많이 늙지 않으셨으면, 건강했으면, 그뿐.


 잘 있어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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