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가장 큰 고민거리일 수도
얼마 전, 아직 비행을 하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안부 연락을 받았다. 요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비행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한 편으로 앞으로 어쩌지 하는 걱정을 품고 있어 늘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남들은 뭔가 꿍냥꿍냥 미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인만 뒤쳐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다 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이런 시기를 반드시 거치는 듯하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시기를 지나쳤고.
몇 달 전에는 대한항공에서 경력직 채용을 실시하고, 기준을 경력 2년 이상으로 뒀다는데, 내가 일했던 곳에서도 8명 정도가 경력 입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니 일면식이 있는 친구도 그곳에 가 있었다. 아무래도 국내 항공사에서 일하면 한국이 베이스라는 장점으로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다른 단점들을 상쇄할 정도로 큰 부분일 것이다.
분명 날개를 달고 싶어 안달이 났었고,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랐고, 골든콜을 받고 기절할 정도로 기뻤다. 비행을 시작하면 더욱더 신나고 재밌는 생활들이 펼쳐진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미래에 대한 걱정 같은 것들이 똬리를 튼다.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베이스가 한국이어도 퇴사율이 다소 높은 직장인데, 타지가 베이스(어디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인 경우 상당수 한국인들에게는 처음부터 쉽지 않은 측면이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질문을 적나라하게 해 보자면, 이 떠돌이의 삶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막말로 40살에도 두바이에 있을 수 있을까?(의 질문은 단순한 나의 결심 이상의 많은 주변 요소들에 영향을 받는다.), 한국에 언제 돌아가야, 무엇을 준비해야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까, 이 화려한 외항사 승무원의 라이프 스타일을 과연 놓아버릴 수 있을까 등등.
두바이에서 직업을 얻었고 그곳을 베이스라 부름에도 일반적인 취업 이민과는 명백히 다른 삶의 형태를 살아가기에 정착된 느낌을 덜 받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계속해서 비행을 다니며 두바이라는 도시에 뿌리를 단단히 내렸다는 느낌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거나 쉽지 않을 수 있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일의 속성이 언제까지나 신나고 재밌기만 할 수는 없어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동료들이 많은 거대한 에미레이트 가족이라 생각하면 든든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늘 다른 사람들과 비행을 하니 거꾸로 소속감은 다소 적고 외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리기가 애매하다면 언젠가는 움직여야 하는 숙명이 있는 셈이다. 처음 비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당시 37살의 한국인 선배님께서, 만약에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빨리 돌아가고 아니면 생각보다 오래 붙어있을 결심을 하라고 했던 말의 저의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제는 안다.
입사하기 전부터 했던 이 진로(?) 고민을 개인적 관점에서 풀어 보고자 한다. 꿈의 직장이지만 플랜 B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면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나의 사견이 아주 많이 반영되고, 일부 편견도 녹아있을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미 과거에 떠나간 선배님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든 사례를 다 알 수가 없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나 나처럼 비행을 그만둔 사람들의 선택지에 대해서 적어볼까 한다.
1. 보직 이동
사내에서 보직 이동을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빈자리 공고가 사내에서 뜨면 지원을 하고 이동을 하는 과정이 열려 있긴 한데, 실제로 드물지 싶다. 일전에 만났던 인도 국적 크루는 이전에 지상직에 종사하다 와서, 지금 승무원을 경험하고, 이후에는 또 다른 항공산업 분야에 종사하며 향후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한다고 했는데 그 친구가 성공적으로 원하는 보직에 갈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당수가 소모직 혹은 단순직 사이의 이동일 테니. 우리 회사에서 일하다 중동의 다른 항공사로, 캐빈크루 매니저, 크루 스케쥴링 팀, 크루 어코모데이션 (숙소) 매니저 등등으로 갔다는 사람들도 보았다.
혹은 개인 사정에 따라 보직의 임시 전환이나 이동이 이뤄질 수도 있다. 예컨대, 임신을 하면 비행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즉시 휴직을 하게 되는데 일부는 지상직 업무로 전환을 받아 임신 중 일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또는 비행을 하다 다쳐서 비행은 할 수 없는데 지상직 업무는 가능할 때 등이다.
내가 다녔던 항공사는 캐빈 크루로 입사를 하면, 일반적으로 GR2(이코노미)-GR1(비즈니스)-FG1(퍼스트)/CSV(Cabin SuperVisor; 부사무장)-PUR(Purser; 퍼서)의 순서를 따라 승진을 하게 된다. 캐빈 크루 업무 중에는 비행도 비행이지만 트레이너로서 신입 교육이나 연간 의무 교육에서 타 크루들을 상대로 트레이너로서 역할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페이 체계가 변화하기 때문에(비행 수당이 사라지는), 비행을 하는 것보다 벌이는 줄어들 수 있으나 사정이나 향후 커리어 플랜에 따라 트레이너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트레이너는 수요에 따라 전업을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비행을 하는 도중에 파트타임처럼 한다. 혹은 사내 공고를 통해 홍보나 행사에 참여할 크루들을 선정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회사의 얼굴이 되어 마케팅 관련 임무를 수행하며 미디어에 노출되기도 하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퍼서 이후에는 PSP(Performance Standard Purser)라고 해서 서비스 스탠더드를 관장하며 종종 실제 비행에 동행하기도 하고, 크루로서는 가장 상위의 역할에 도전할 수도 있는데 당연히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가 임명되어 일한다. 그밖에 크루 출신으로 크루를 관리하는 매니저 직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오피스직 전환으로의 성공적 사례일 수 있겠다.
2. 다른 항공사로의 이직 (국내 or 외항사 or Private jet)
이번 대한항공 경력직처럼, 일부 국내 항공사들이 부정기적으로 경력직 공고를 내놓기는 한다. 일반적으로 4년 이상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례적으로 이번에는 2년 이상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최근 드러난 경영상 문제점들과 관련하여 승무원 절대 수가 좀 더 필요했지 않을까 아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사실 신생 항공사가 생기는 것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이 역시 모두 신입을 가지고 회사를 운영할 수가 없는 노릇이니 경력직을 채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어도 그렇게 해서 기존 경력직들이 상당수 입사했다고 알고 있다.
외항사 승무원들은 비행을 계속하고 싶으면 대부분 결국은 한국이 베이스였으면 하는 소망을 품게 마련이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고, 외국을 베이스로 여전히 비행을 잘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개인 차가 있겠으나, 경험상 연차가 쌓일수록 한국이 베이스이길 바라는 경향이 증가한다고 본다. 한국이 베이스인 게 국내 항공사뿐만은 아니다. 몇몇 외국 항공사들, 주로 유럽계 항공사들이 한국을 베이스로 하면서 한국과 자신들 거점을 연결하는 노선에 투입할 승무원들을 뽑고 있기도 하다. 거의 경력을 선호한다. 한 달 비행 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 수당이 좋고 안정적이라 투잡이 가능하다고도 알려져 있다. 다만 기존 인력이 쉽게 빠지지 않아 기회가 잦은 편이 아니다.
처음 항공사 준비를 하면서 핀에어에 면접을 간 적이 있었는데, 현지 관리직과 한국인 승무원, 이렇게 두 분이 앉아 면접을 주관하였다. 내 조에 경력이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그 한국인 승무원 면접관께서 매우 노골적으로, 우리 경력 있는 사람 선호하는 거 알죠? 라며 왜 우리가 경력이 없는 사람을 뽑아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보라 했다. 거의 비웃다시피 했던 표정이 매우 날카롭게 남아있다. 반면 KLM은 예외적으로 한국이 베이스면서 신입이 도전 가능한 유럽계 항공사이다. 경험이 없이도 도전할 수 있는 유럽계 항공사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력직들에게는 승무원들의 종착역과 같은 인식도 있다. 왜냐하면 2년 계약직이라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비행을 하길 원한다면 숙제가 풀리지 않는 면이 있을 테고, KLM에서 전환기적으로 승무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은 경우에는 매력 있는 선택지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시장이 크지 않겠지만, Private jet(개인 전용기)을 타는 크루로 지원해 볼 수도 있다. 알음알음 지원을 하게 되거나, 추천을 받거나 하는 등의 경로를 통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홍콩이나 상하이, 유럽 혹은 미주 지역에 수요가 많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채용이 문이 열려야 가능하다. 처음 우리가 승무원 직을 시작했던 것과 똑같이, 부정기적으로 운영되는 채용이기 때문에 언제 기회가 올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니 채용 공고에 계속해서 귀 기울이고, 기회가 오면 잡아야만 한다.
3. 국내 일반 기업으로의 이직
승무원 경험을 살린다기보다는, '외국계'에서 일했다는 표현을 살린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고, 만약 기존에 회사 경력이 있다면 이와 결합하여 경력직 입사를 하거나 또는 나이가 아직 어리다면 신입으로의 입사가 가능할 수 있다.
기존에 회사에서 일하다가 승무원 직을 택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당시 27살 극 후반에 채 2년이 안 되는 경력이었던지라 내가 어떻게 다시 일반 회사로 돌아올 수 있을지 솔직히 많이 걱정이 됐었다. 이는 막연한 기우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적어도 2, 3년은 승무원 직을 하고 싶을 텐데 그러고 돌아오면 거의 30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그리 편견을 갖고 있냐고, 30살도 적은 나이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접근했을 때, 쉬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최소한 기존에 다녔던 회사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눈높이를 버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더 길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 그래서 어렵기도 하다. 저울질을 하는 과정에서 굳이 편안히 비행하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놓아야 하나 싶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밖의 것들에서 잃는 것이 더 많다고 판단되면, 때가 온 것이다.
주변에서 이와 같은 경력 등을 잘 살려, 외국계 일반 회사로 이직했다는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짧게 일한 뒤, 한국에서 신입 채용으로 회사에 입사한 사례도 알고 있는데 그 친구는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 두바이가 아무래도 다양한 기업들이 있고, 여러 무역 관련으로 들어오시면서 현직 승무원들이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 경우들이 더러 있는데, 이 과정에서 인맥을 쌓아가는 경우도 보았다.
아마 이 선택지에서 갈림길은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의 회사로 이직을 원하느냐일 것이다. 같이 비행했던 한국인 선배님들은 대개, "한국에서 회사 다녀봤으면 오래 버티겠네. 이 생활이 얼마나 괜찮은지 훨씬 더 와 닿을 것 아냐?"라고 했다. 그렇다. 돌아간다고 답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원하는 직무에서 전문성을 키우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긴 했지만, 회사로 다시 기어 들어간다고 갑자기 상황이 아름답게 풀려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냉철한 위치 판단과 부가적인 노력 여하에 많은 부분이 달렸다고 적어야 할 듯싶다. 계속해서 취업 트렌드를 읽어 가야 할 필요성이 있고, 이직하고자 하는 기업의 방향을 잘 설정해서 꾸준한 준비가 병행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 승무원들이 고국행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자신이 없거나, 나이가 애매하거나, 기존에 누리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3. 개인 사업
크루분들 중에 재주가 뛰어난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노력과 희생이 일부 따르기는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취미생활을 해나가거나 투잡을 뛰기 좋은 환경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사업 아이디어를 발굴하여 향후 사업 발판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여는 것은 흔한 일이고, 화장품 라인을 출시한다거나, 소규모 무역을 시작한다거나 등등, 요즘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유투버나 작가, 심지어는 앱을 개발해 운영하는 등으로 활약하시는 분들도 보았다.
4. 학업 또는 시험 준비
기존 전공에서 석박사로 나아가거나, 서비스직에서 일하였으니 관련하여 CS 방향을 잡는다거나, 통번역 쪽으로 더 공부를 하게 됨이 제일 흔해 보였다. 아예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 퇴사 후 전환기를 겪을 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학업을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갈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길이 좁아지는 경우를 겪게 될 수도 있어 신중함이 좋다.
퇴사를 하고 공무원을 준비하는 인력이 많은 것처럼, 승무원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니면 여타 다른 전문직 관련 대학원이나 시험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기존에 방향성이 있었다거나 궁극적인 꿈이 사실은 이쪽인 경우가 해당일 것이다.
5. 승무원/영어 학원 강사 또는 과외
기존에 많은 승무원 학원들이 있고, 수많은 친구들이 승무원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이 시장이 아무래도 수요가 상당히 있으니, 전환기적으로 혹은 장기적인 부업이나 직업 개념에서 뛰어드는 경우가 굉장히 굉장히 많다. 특히 건너 건너 듣는 근황들 중에 제일 다수의 사례였다. 전업을 하든, 학업과 병행하든, 다른 준비를 하면서 용돈벌이를 하든. 진입장벽이 낮지만 나름의 경쟁이 있다. 평소 SNS 등을 통해 인지도를 적절히 쌓아오면서 수강생 모집을 하여 안정화시키는 분들이 많았다. 외항사 승무원은 영어가 뒷받침되기 때문에 굳이 승무원 영역 한정이 아니더라도, 전문적으로 영어 강사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는 경우도 많다.
6. 파일럿 준비
승무원을 하다가 파일럿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본인이 승무원을 계속하면서 혹은 그만두고 파일럿 스쿨과 트레이닝을 거쳐야만 한다. 기능 습득 이후에 특정 비행시간이 충족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함께 조인했던 배치 메이트들 중 이쪽으로 방향을 잡고 본국을 오가며 파일럿이 되기를 준비하다 현재는 승무원을 아예 그만두고 준비 중인 친구들이 더러 있다. 사실 비용이 꽤 드는 편인데, 비행을 하면서 플라이트 크루들로부터 남아공에서 트레이닝을 하면 비용이 비교적 적게 든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7. 본업으로 복귀
재미있는 사실은 승무원을 하러 온 친구들 중에 독특한 이력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주로 외국 국적의 친구들이 그러했는데,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직을 가졌는데 새로운 경험 혹은 쉬는 개념에서 이 직업을 선택해 왔다거나 또는 예술이나 사업을 하던 친구들이 영감을 받기 위해 오거나 그런 경우들이다. 아무래도 직업 선택의 유연성과 휴식이나 전환이 자유로운 문화권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전문직을 가졌음에도 본국에서 그리 나은 대우를 받지 못해서가 이유이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리 길지 않게 일하다 본업으로 복귀한다. 그 밖에도 다소 기능적, 전문적인 일들을 하다 온 경우에는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편이다.
현재의 나는 미국에 와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보다는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낫겠다는 계산이었다. 일단 가능성을 나이 같은 것들로 차단받지 않으리라는 나름의 희망이 일단 컸음을 고백해 본다. 승무원 일이 재밌고 신나고 여러모로 좋았지만, 3년을 하면서 이제 충분하다 느껴졌다. 잃는 것이 얻는 것보다 더 커져버린 순간이 왔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국에 정착을 하고, 시간의 흐름과 나의 노력에 따라 커리어가 쌓여가고 보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한 준비 중에 있다.
비행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한국인들은 혼란해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준비생이든, 현직에 있든, 이미 결정을 내리고 다음 장막을 열어낸 지금의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고민이 많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어떤 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현재를 즐길 수 없는 지경이기도 했다. 적당한 고민과 계획은 현재와 미래에 건강한 영향을 끼치지만, 지나친 고민은 현재를 망치는 결과를 낳게도 한다. 하지만 계속 일하든, 이직을 준비하든 뭐든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느 정도의 노력과 준비는 필요하다. 그러니 좀 더 열린 눈으로, 여유를 가지고, 다만 차분히 꾸려나갔으면 한다.
전직 크루 커뮤니티에서 현재 다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묻는 포스팅이 있었는데, 댓글에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들이 올라왔다. 글쎄, 우리나라로만 무대를 한정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이 좀 더 열려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여전히 크루, 지상직 혹은 파일럿으로 방향을 틀었다거나, 행동치료학자, 간호사, 펫 트레이너, 소프트웨어 디자이너, 선생님, 재무 상담사, EU 직원, 웨딩 플래너, 카페 주인, 헤드헌터, 부동산 중개인, 경찰, 마케팅 매니저, 세일즈 매니저, 프라이빗젯 크루, 연기자, 호텔리어, 캐빈크루 트레이너, 청소업체 오너, 군인, 농장 경영, 항공 케이터링 관련, 변호사, 회계사, HR 매니저, 은행원, 사업 개발 매니저, 교수, PR 매니저, 동기부여 강사, 카지노 관련, 스쿠버 다이빙 강사, 작가, 컨설팅, 인테리어 디자이너, 화가, 항공 교통 관제사, 건설현장 안전 담당 매니저 등등. 그들이 하나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밖에 나왔을 때, 에미레이트에서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함께 일한 경력을 높게 쳐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인 크루들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할 때, 아마 한국 취업 시장과 한국에서 따지는 조건이 따라붙기 때문에 지레 겁을 집어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도 그렇다. 건너 듣는 이야기들 중에는 그만두고 돌아가 결국에는 이 생활을 내내 그리워하더라는 사연들도 듣게 된다. 그렇지만 부딪히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나를 후려치면 남들은 나를 더 후려치게 마련이다.
이 글을 쓰게 한 동기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승무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되든 안 되든 일종의 플랜 B가 필요할 수 있으니 준비되길 바란다는 당부와, 다른 하나는 현재 비행을 하며 불안한 나의 친구들에게 그래도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불안해하지 말고 즐기되 깨어있으라, 움직여야 할 때가 됐다 느끼면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서다.
끝으로, 아무래도 직장과 정착, 가족 등의 개념이 얽혀 들기 시작하면 분명 타인과 결부 지어 나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소 누군가에 의해 내 행복이 좌지우지될 소지가 있음에 유의하고, 과연 때인지 묻자. 그렇게 결정해야 '할 때'는 하자. 남과 비교하지 말고,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도 말자.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앞으로의 결정에 부디 행운이 깃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