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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정 Nov 22. 2021

작은 것들을 위한 시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셰이프 오브 워터>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갈 수록 심해지는 경쟁, 그리고 양극화, 늘어나는 폭력과 혐오는 사람들을 패배감에 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때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가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우리에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제시하는 위로는 조금 특별하다. 때로는 아무곳으로나 도망가고 싶은 우리들에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특별한 환상의 세계로의 초대장을 건낸다.



판의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2006)


오필리아는 동화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선택한 재혼 상대는 반군을 토벌하는 부대의 선봉장인 비달 대위이다. 영화는 오필리아와 임신한 어머니가 ‘비달’대위가 있는 산 속 주둔지로 이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오필리아는 어머니의 차멀미로 잠깐 일행이 멈춘 사이, 퍼즐 같은 조각을 어떤 조각상에 끼워 넣게 되고, 그때부터 오필리아에게 환상의 세계가 시작된다. 조각을 맞출때부터 오필리아를 따라오던 벌레요정의 도움으로 미로 속에서 ‘판’을 만나고, 자신이 공주이며 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판은 오필리아가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세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필리아가 해야할 임무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그녀를 둘러싼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다. 새 아버지인 비달대위는 파시스트 정권의 꼭두각시답게 무자비하며, 매우 가부장적이다. 그런 세계에서 오필리아는 순수함과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무엇에도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폭력에 맞선다. 


오필리아는 정말 지하세계의 공주인걸까? 단순히 기괴한 분위기를 가졌다고만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오필리아가 맞는 결말이 무엇이든, 영화는 우리가 험난한 삶에서 무엇을 간직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배려, 우정, 희생….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 숭고한 것들을 잘 지켜낸다면 끝이라도 절대 끝난게 아님을 말해준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8)


냉전 시대, 우주를 정복하는 것으로 경쟁하던 미국과 소련은 극비리에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일라이자가 일하는 곳은 미국 항공우주센터의 한 기밀 시설이다. 일라이자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 


사고로 인해 목소리를 낼 수 없지만 일라이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배려는 따뜻하다. 그래서 그녀 곁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고, 그들은 일라이자가 무엇을 하든 기꺼이 돕는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라이자는 갇혀있는 생물에게도 스스럼 없이 다가간다. 겉모습이 완전히 다르고, 나한테 위협을 가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도 일라이자는 그에게 언어를 알려주고, 그와 소통하며 우정 이상의 감정까지도 나누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 얘기는 대부분 너무나 멋진 남성과 여성이 만나 운명처럼 반하고, 사랑하는 식이다. 완전히 다른 존재,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사랑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Shape of Water'라는 영화 제목처럼 감독은 어떤 그릇에 담기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물의 형태가 사랑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것에 착안해서 그런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말을 할 수 없는 일라이자는 ‘정상인’이 아니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일라이자는 갑자기 잡혀 온 미지의 생물과 똑같다. 그런 사람과도 교류가, 사랑이 가능하다는 건 결국 우리가 정하는 ‘정상’의 기준이 터무니 없는 상상처럼 말도 안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전설속의 사랑,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누구나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형태는 마치 물처럼, 담는 그릇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는 흐르는 시냇물이 될수도, 비가 될 수도, 아니면 바다가, 파도가 될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판의 미로>에서 요정들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듯,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괴생물체를 보고 사람들이 겁에 질리듯,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환상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볼 수 있는 이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는 그가 제시한 환상이 무엇보다 따뜻한 위로가 된다. 

주로 공포영화나 SF 액션물이 많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두 영화는 아주 특별하다. 어찌보면 기괴하고 조금은 낯선 세계. 하지만 마음을 조금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바라보자. 어쩌면 위로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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