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칠보다 힘든건 마음이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사람들이 흔히 좆소라 말하는 회사지만
나는 그 좆소를 사랑한다.
임원직도, 관리직도, 장기근속자도 아니지만
이 회사를 제대로 키워서
회사도 성공하고 나도 성공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싶다는 마음,
나는 그런 애사심을 가진 디자이너다.
그 애사심 덕분에
사무실 대청소,
유튜브로 음악 틀기,
택배 보내기,
CS전화 받기,
각종 잡일을
군소리 없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애사심도
시험에 드는 날이 오고야 말았는데,
나에게 마네킹 페인트 칠을
은근슬쩍 떠넘기는 사건을
마주하고나서부터였다.
집에 온 나는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나 다음주에 회사에서 페인트칠 해야돼…
살다살다 내가 이 회사에서 페인트 칠을 다 해보네”
“뭐? 칠할 게 뭔데?
“전신 마네킹 두개랑, 손 두개, 팔 두개, 상반신 마네킹, 다리도 있네”
“여보. 그럼 주말에 나랑 같이 하자“
“엥? 무슨 소리야? 주말에 회사를 같이 가자고? 거기서 나랑 칠하자는거야?“
“그거 힘들어, 내가 해봐서 알아. 주말에 내가 칠해줄게”
“말도 안되지 그건! 당신은 주말에 쉬어야지. 그러다 병나서 쓰러져. 내 회사 일인데 당신이 뭐하러? 괜찮아 나 할 수 있어”
‘주말에 같이 칠하자’는 한마디로 인해 어둡던 마음이 금새 환해졌다.
남편은 주말 출동 작전을 금방 포기하긴 했지만 이내 아쉬운듯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여보, 그럼 내가 전화할테니까 스피커폰으로 사무실에서 전화 한 번 받아봐”
“…뭐라고 하게?“
“내가 지금 회사 휴가 쓰고 당신 회사 가는길이라고 할게, 그리고 같이 페인트칠 하자고 하는거지. 당신 힘들어서 안된다고. 엄청 걱정하면서!
아니면 우리 아버지(시아버님) 창고에 페인트칠하는 장비 다 있는데 우리 아빠가 간다고 해볼까? 시아버지가 며느리 회사에 가서 페인트를 대신 칠해주는거야. 며느리 힘들어서 안된다고”
“와, 회사에 아버님이? 나 완전 사랑받는 아내네. 그것도 모자라서 며느리 아까워서 아버님까지 오시면 회사에서 나한테는 페인트칠 절대 못시키겠는데“
한바탕 둘이 웃고나서 말했다.
“여보 나 그래도 할만할 것 같아. 칠하는 건 물론 나 하나지만 그 옆에 왠지 당신이 있어주는 거 같아서 꼭 둘이 하는 것처럼 힘날거같아. 그래서 그냥 든든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맞이한 월요일. 주간 일기예보를 보니 역시나 월요일은 페인트 칠하기 좋은 날이었다.
이번주부터 장마인데 월요일만 유독 맑았다. 기왕 해야할 일이라면 미루면서 시간 끌기보다는 초장에 끝내는 편이 낫다.
며칠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일기예보 덕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검정 리본이 달린 챙이 넓은 모자, 쭈그려 앉기 편한 청바지, 산지 10년된 스트라이프 반팔티를 챙겨 출근길에 나섰다.
그래. 오늘 다 끝내버리는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왜인지 신이 났다. 무엇보다도 난 혼자가 아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간단히 오늘 일정 계획을 보고하고, 바닥에 상자와 비닐을 깔고 페인트칠 준비를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사옥에 5층, 4층에 흩어져있는 마네킹을 들고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했는지. 땡볕 아래가 어찌나 뜨거운지, 구부정한 자세로 잘못 칠해진 곳은 없나 살펴보는게 어찌나 뻐근한지.
오전에 작업을 마치고 집에서 좀 쉬다가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집으로 운전하며 돌아가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내가 어제 그랬잖아, 당신이 이미 같이 있어주는 것 같아서 나 잘할 수 있다고, 근데 오늘 어땠는지 알아?
와…진짜 너무 힘드니까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 중간중간 당신 생각도 좀 날 줄 알았거든?! 근데 진짜 아~무 생각이 안들어. 그냥 마네킹 들고 계단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바쁘고, 흠집난데 없는지 찾기 바쁘고, 그늘 찾기 바쁘고. 그와중에 배는 또 어찌나 고픈지, 너무 웃기지 않아?“
어디에 웃음포인트가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힘든 날을 보내고도 박장대소하며 집에 갈 힘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