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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가족의 대화 22

마음이 가장 투명한 순간

by 난생

맞벌이 엄마는 결심했다.피곤한 몸을 좀 더 이겨서 아이와 둘만의 데이트 시간을 갖기로.


첫째와는 지난번 다녀왔으니 이번엔 둘째 차례다. 우리는 색칠할수록 두꺼워지는 그림을 그리러 가기로 했다. 아이도, 나도 태어나서 처음 그려보는 유화였다.


체험이 끝나면 같이 젤라또도 먹기로 했다.


그 약속 덕분에 행복하게 지난 평일을 지나왔다. 그리고 토요일, 약속의 날이 되었다.


아이는 모양틀로 점토같은 걸 꽃잎 모양대로 찍어내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체험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예약한 클래스는 20세부터 90세 할머니까지 성인을 위해 운영되는 유화 클래스였다.


예약할 때 샘플 그림 사진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냐고 물어봤고, 아이가 맘에 드는 그림이 있다는 클래스에 덜컥 등록한 것이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님이 말했다


“아들이에요?”


그 말은 마치 엄마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러 왔는데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달고온 상황으로 보신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초등 1학년 아이가 그릴거라고 하니 선생님 표정에 난감한 미소가 비쳤다. 그래도 애쑤 덤검하게 유연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하시는 게 보였다.


나라도 덤덤해야히니까

이젠 잘 그린 그림이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에 도전해 본다는 맘만 잘 돌봐주기로 했다


선생님은 핸디 코트를 크게 몇 덩이 덜어주시고는

나이프로 어떻게 꽃잎을 만드는지 시범을 보여주셨다


아이가 예상했던 모양 찍기에 비하면 극악의 난이도였다.


‘자, 이렇게 하면 돼요~ 해볼 수 있겠어요?’ 하는 선생님 이야기에 아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네…’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거 분명 하다가 잘 안되면 짜증낼 것 같은데.

당황스런 마음은 받아주더라도 예의없이 행동하면 잘 대처해야겠다.’


예상대로였다.


꽃잎 세 개를 만들었다가 맘에 안 든다고

거칠게 긁어내 버리길 세 차례.


그리고

“이건 엄마가 청소해!” 라는 말을

세 번째 하고 있을 때

“그럴 땐 청소가 아니라 도와달라고 해야지” 하고

말하고 나니 화실에 긴장감이 돌았다.


어색해하는 선생님,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 돼서 짜증 난 아이,

그리고 훈육의 타이밍을 재는 나.


그 공기를 깨고

아이가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종이에 쓱 그었을 때,


“그거야!”

나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생각 없이 그은 그 한 터치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꽃잎이었다.


짜증의 기운은 스르르 옅어지더니

“이렇게 하는거네! 이건 오히려 휙! 휙! 해야되는거야!”

하고 갑자기 과감한 나이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종이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위치만 맞춰주니 금세 예쁜 꽃 한 송이가 만들어졌다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로 풍성한 꽃 한 다발을 만들어냈다


색칠할수록 두꺼워지는 그림에 대한 로망은 선생님의 라스트 터치와 함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완성된 그림을 받아들고 화실 문을 나서며 의기양양하게 젤라또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젤라또 마저도 피자 치즈마냥 쭉쭉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두 눈이 휘둥그래지게 만들었다


완벽한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물었다.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물어도, 또 물어도

아이는 시큰둥하게

“재밌었어~” 짧게 대답했다.


내심, 반응이 시원치 않아 살짝 서운했다.


뭐 그래.

에버랜드를 간 것도 아니고,

물놀이를 하러 간 것도 아니잖아

뭐 얼마나 대단한 리액션을 기대한거야

이쯤에서 생색은 그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집에 왔다


빠르게 사라진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너무 졸려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는데

아이가 다가와 말했다


“엄마. 오늘 그림 그린거 얼마나 좋았어? 1부터 10중에 몇이야? ”


“음… 뭐? 그걸 이제 물어본다고? 갑자기?”


“말해봐! 1부터 10중에 몇이야!?”


”엄마는 10! 처음인데 우리 너무 잘 그렸어.넌?“


“맞아, 나도. 나도 10! 그럼 젤라또는? 젤라또는 1부터 110중에 몇이야?“


“그것도 10! 그동안 먹어본 젤라또 가게 중에 제일 맛있었어. 너는?”


“나도 10이야! 아이스크림인데도 엄청 길게 늘어나는거 봤지?”


“영상으로 다 찍어두길 잘햇어! 우리 이제 앞으로 젤라또 먹고싶으면 고민도 하지말고 거기로 가자!”


“좋아! 그럼 엄마 오늘 전체 하루는 1부터 10중에 몇이야?”


“엄마는 99. 우리 다음에 놀러가먼 1점 정도는 더 좋은 일이 또 생길거같아서. 다음도 너무 기대돼. 하지만 기대되는거 생각없이 말하자면 10이야. 넌?“


“…나도 9.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기대된다. 그래도 오늘 기분은 10이야!”


낮에는 묻고 또 물어도

대답이 시큰둥하더니

이젠 아이가 먼저 물어본다.


“엄마, 오늘 진짜 재밌었어.”

그 말이, 오늘은 유난히 투명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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