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서 '백수'가 되다
결혼이란, 도전의 연속이라 감히 정의해 본다.
남편과 내가 한 집에 살며 생활 습관을 맞추기 시작한 건 결혼이 준 첫 번째 도전이었다.
우리가 가진 생활 습관은 정반대의 생활 습관을 가진 엄마 밑에서 자란 탓에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애정의 깊이와는 사뭇 다른 문제였다. 애정으로 극복되지 않는 것이 생활 습관이었고 그 차이를 좁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식탁에 차려 둔 반찬은 언제 치우는 게 맞을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머님은 언제 치우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길. 정답이 없는 문제인데도 집집마다 '내가 하는 이 방법'이 더 낫다고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는 그 대단한 말에는 사실 거창한 게 없다. 확연히 다른 집안 분위기는 차려 둔 반찬을 언제 치우느냐와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감지된다.
친정 엄마는 저녁 밥을 후루룩 마시듯 1등으로 식사를 끝내곤 했다. 그러곤 바로 싱크대 앞으로 가서 설거지를 시작한다. 이어서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때마다 엄마는 남아서 식사 중인 다른 가족에게 물었다.
‘이 반찬 더 먹을거니?’
안 먹는 반찬이 있다고 하면 불필요한 반찬 그릇들을 솎아 내며 최대한 빨리 설거지를 마쳤다. 엄마가 그렇게 저녁 설거지를 서두른 건 일일드라마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시어머님은 반대다. 마지막 한 사람이 식탁을 벗어날 때까지 차려둔 반찬을 치우지 않는다. 식사 중에 이야깃거리라도 생기면 반찬은 오랫동안 식탁 위에 올라 있다. 저녁 설거지는 보통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시작한다.
그런 시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불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저렇게 상온에 오래 두면 반찬이 잘 상할텐데. 벌레가 꼬일 것 같은데…’
각자 입장에서 이런 일상들은 우리가 살면서 무심히 지나쳐 온 배경일 뿐이다.
너무 사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서로 상대방이 이까짓 것 쯤이야 금방 이해하고 고쳐 주겠지 기대했던 것 같다. '이게 더 편하니까' 내 방법을 따라 주기를 고집할수록 갈등은 커졌다.
나는 남편이 식사를 마친 뒤 그릇도 수저도 치우지 않고 몸만 훌쩍 떠나는 게 미웠다. 남편은 사람이 아직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반찬을 치우며 서두르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양한 논쟁 거리에 부딪혔고 그럴 때마다 서로 얼마나 다른 배경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인지 알아가며 맞춰 나갔다. 그 치열했던 시간 덕분에 지금 우리는 우리만의 표준 같은 게 생겼다.
예를 들면, 요즘은 식사를 마치면 자기가 먹은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는 일단 싱크대에 곧바로 넣는다. 단, 반찬은 먹는 사람을 배려해서 미리서부터 치우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에 반찬을 담을 때부터 한 끼 분량 만큼 접시에 따로 덜어서 반찬이 상할 걱정을 줄였다.
이만하면 남편과 잘 해내는 것 같다고 느낄 때쯤
결혼은 새로운 도전 과제를 내놨다.
이제는 남편과 함께 가장의 무게를 나눠 들고, 나보고 워킹맘이 되어 보란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결혼이 사람이라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처음에 난 전업 주부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 없도록 결혼 생할은 제멋대로 먼저 가버렸다.
남편과 나, 그러니까 우리끼리는 '같이 벌어서 집이며 살림이며 키워가며 잘 살아보자'라는 다짐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결혼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드글드글하다는 걸 간과했다. 우리의 그런 다짐은 갑자기 등장한 냉정한 현실 앞에 가볍게 제압되고 말았다.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그 때, 나는 체질상 임신이 어려운 것을 알고 산부인과에 다니던 중이었다. 매일 호르몬제를 먹고 기초 체온을 살피며 몸이 준비되길 바랐다. 임신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웬걸. 신혼집에 벽지 바를 때쯤 첫 아이가 찾아왔다.
이때부터 대환장 파티. 임신만 어려운 줄 알았더니, 나는 임신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고위험 임산부였다.
산부인과에서는 자궁수축을 방지하기 위해서 근이완제인 '라보파'를 처방해 줬다. 그 부작용으로 심박동수는 급격히 올라갔고, 복용 후 일정 시간 동안은 근육이 풀려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어서 화장실까지 기어갔다.
내 몸이 그럴 줄 몰랐다. 직장은 그때 포기했다. 출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임산부들처럼 나도 으레 그럴 수 있을거라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만 낳고 나면 좀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겠지.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런데도 7개월만에 아이가 나와서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2KG도 안되는 몸으로 겨우 생존한 아이를 어딘가 맡겨 놓고(그게 친정 엄마라도) 다시 일하러 나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이후의 삶은 뻔하게 흘러갔고 그렇게 전업주부가, 열혈 엄마가 됐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일 할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밤에는 취업준비생이라는 끈을 놓지 못하고 이런 저런 공부들을 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건강해졌다.
엄마가 된 것뿐만 아니라,
직장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지냈던 시간은 도전의 날들이었다.
(물론 직장을 포기한 건 내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다. 내가 충분히 건강하기만 했다면 아이도 더 건강하게 낳았을테고, 임신 기간에도 직장을 다니며 유지할 수 있었을테니까. 행여 아이 탓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된다.)
이만하면 이제 나도 일해도 되지 않나 싶던 작년 어느 날, 괜찮은 기회가 찾아 왔다. 어느 사립 학교의 계약직 교직원이 된 것이다. 10년만에 다시 얻은 직장이라 다시 시작한 일과 동료들이 내 가정 만큼이나 소중했다.
그러나 우연히 '직장내 괴롭힘'을 알고 부터 오랜만에 되찾은 내 바깥 세상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나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신입 직원은 상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주로 근무 시간으로 장난질을 쳤다. 기준도 없이 제멋대로 타 직원에 비해 근무지를 초과 배정하고, 점심시간까지 교묘하게 가로챘다. 본인들은 지키지도 않는 규칙까지 갑자기 만들며 지키지 않는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성을 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쪼아댔다. 그 직원이 괴롭힘 당한 이유를 직접 들었는데 '말투가 앵앵대서'였다.
나는 그걸 모른척 할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송곳이 나였다니. 원인을 찾고, 개선의 목소리를 냈다. 주관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최소한의 기준이라도 지켜서 근무 지침과 시간을 배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작은 송곳 하나에 콧대 높은 사립 학교가 변할 리 만무했다. 결국 나는 6개월만에 힘 없이 사직서를 냈다.
'직장내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으나,
개선의 의지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이에 00월 00일 부로 사직 의사를 밝힙니다'
사직서에는 10년 간 품었던 일하고 싶던 의지까지도 꾹꾹 눌러 담았다.
이 나이에, 이 공백 기간으로 내가 갈 수 있는 일자리는 이런 곳 뿐이다. 사람이 부품 취급 되는 곳.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되는 곳.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인력들이 모인 곳. 어딜 가도 똑같겠지.
체념과 치유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묵묵히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챙겼다. 다시는 일하겠다며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 놓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이 대학병원 문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점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너무 힘들어 했다. 아침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편이 출근하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은 버틸대로 버티다 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계 사정이 갑자기 불안해졌다.
남편은 그동안 얼마나 참은 걸까. 앞으로는 괜찮을까. 아이 학원은 어쩌지. 끊어야 할까. 코딩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그만두게 해야할까.
이제는 진짜 일을 해야 한다. 일할 마음이 들지 않아도 일을 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편이 집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 걱정 않고 나라도 나가서 일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남편에게서 독립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게 펼쳐진 또 다른 도전이다.
남편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나는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동안은 내가 아플 때 남편이 병원비를 지불했지만 과연 나는 그럴 수 있는가. 남편이 아플 때 내 힘으로 병원비를 내줄 수 있을까. 아이들을 책임지고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살림만 하던 내가.
신세한탄 대신에 뭐라도 해보겠다고 매달려서였을까. 내게 또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10년전 경력이지만 그걸 인정해주고 나를 불러 준 곳이 있었다. 내게 적합한 직급을 주고, 배울 점이 많은 동료와 상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대표에 대한 평도 대내외적으로 좋았다. 직무 중 일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기도 했다. 가장 큰 난관은 집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 뿐.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적응하기로 결심했다. 교통편을 검색해보니 급행 지하철을 타면 1시간1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여성 가장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쯤이야 당연히 견뎌야지.
...그런데 못 견뎠다.
처음 일주일은 그런대로 잘 다녔다. 그러다 금요일 오전, 출근 시간대 9호선 급행 지하철 속에서 숨이 막히고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경험을 했다. 내 몸이 조절이 안 되는 것이 기이했다.
어찌저찌 지하철을 탈출해서 회사에 도착한 뒤 정신 없이 일을 배우고, 퇴근하고 그 다음주 월요일이 돌아왔다. 눈을 뜨자마자 그 지하철 속 풍경이 그려졌다. 막막하고 두려웠다.
고작 이까짓 것에. 매일같이 그 지옥철을 빽빽이 채우는 다른 직장인들은 다 견디는데 왜 나만 못해. 그런데도 그날의 지하철 생각에 몸이 일어나지지 않았다. 회사에 엄청 눈치가 보였는데도 월요일에 출근하지 못했다.
마음을 고쳐 잡고 다음 날은 좌석 버스로만 갈 수 있는 경로를 골랐다. 출근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지만 확실히 밀집도는 좀 줄어 들어서 숨은 쉴 수 있었다. 몸이 덜덜 떨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시간대에 나오려면 늦어도 일곱시까지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행여라도 7시에 지나는 버스를 놓치면 바로 지각이다. 지하철은 놓치더라도 1~2번의 기회가 더 있는데 버스는 한 번 놓치면 너무 조마조마하다.
그 다음날은 자차로 운전해서 가봤다. 중간에 차가 심하게 막히는 구간이 2구간 정도 있었는데 정체가 될 때마다 지각할까봐 운전하는 손가락이 달싹거렸다. 게다가 서두르면서 급하게 차선을 변경하느라 접촉사고까지 날 뻔 했다. 이 방법 역시 별로 안정적이진 않았다.
이러나 저러나 이런 방법들로는 오래 지속할 자신이 없었다. 집 가까운 곳으로 다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괴로웠다. 이거 하나 못 견뎌서 결국에 그만두는 거니까. 10년 동안 묵묵하게 직장 생활 해온 남편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백수다. 아이들 여름방학 기간 동안 남편이 아이 둘을 케어하기 힘들 것 같아서 일단은 구직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어떻게 얻은 제대로 된 직장인데, 2주밖에 버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가족들을 위해서 더 참았어야 했는데 남편만큼 견디지 못했다는 데 스스로 화가 났다. 사립학교 때와는 다르게 묵묵히 집안일을 할 수도 없었다.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며칠간 방황 끝에 나는 너무 답답해서 공원 산책로로 향했다. 도대체 내가 어쩌면 좋을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할 땐 걷는 게 최고다. 걷다보면 나아갈 방향이 보이고, 이런 저런 고민들도 그 방향성에 맞게 가다듬어진다.
첫째, 남편과 나는 이제 제법 합이 잘 맞는다. 남편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익숙해져 가고, 나는 밖에 나가 일할 준비가 점점 더 잘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그저 오랜만에 다시 일을 하려니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이걸 실패로 착각하지 말자. 남편이 집에 있다는 건 내가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걸 잘 이용해야 한다. 이제는 서로의 역할을 조금씩 나눠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자.
둘째, 이러나 저러나 앞으로는 일을 해야한다. 계약직으로도, 정규직으로도 있어봤지만 뭐니 뭐니해도 집과 가까운 곳이 중요하다. 20대 때는 집에서 한시간 반 거리까지 알바를 다니기도 했지만 그건 옛말. 이제 내 체력으로는 집에서 너무 멀면 출근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았다. 의지로 부딪힐 문제가 아니다.
혹시 다음에 또 부조리가 판치는 곳을 만나게 된다면, 살면서 한 번은 송곳이 되어 봤으니 이번에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질끈 눈 감아 볼까 싶다. (뒤에서 조용히 챙기는 쪽으로...)
셋째, 예전 경력을 살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 어렵다. 직종 특성상 종로나 여의도에 회사가 몰려있어서 거기까지 나가기엔 무리다. 일단 단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넷째, 체력이 많이 아쉽다. 잠깐 걷고 집에 들어오는 데도 기진맥진 하는걸 보면. 먼길 출퇴근 하면서 극심한 피로 때문에 힘들었다. 일하면서 살림 병행할 수 있도록 운동으로 체력을 다져보자. 아이들 여름방학 기간 동안 운동하면서 체력을 올려보자.
다섯째, 새로 기술을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딜가나 10년 공백은 신입이나 마찬가지. 기술 배워서 신입으로 다시 문을 두드려 보자. 애매한 경력직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다.
여섯째, 남편에게 사죄해야겠다. 내가 전업주부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동안 내가 못 이룬 것까지 남편이 대신 이뤄주길 바랐다. 멍청한 짓이다. 남편이 힘들 때 보살피기 보다는 남편이 더 강해지기를 기대했다.
정작 나는 출퇴근 지옥철도 2주 밖에 못버틸 거였으면서. 이상한 정의감에 사로잡혀서 가정의 안녕보다 부조리나 고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느라 직장도 잃었다.
남편은 나 같은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어려운 통근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부조리를 앞에 눈 질끈 감고 뒤로는 몰래 쓴웃음 짓던 날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모든 게 그의 끈질긴 도전의 날이었음을, 이 세상 가장의 무게였음을 이제는 나도 치열하게 도전하고 배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