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거 다 아는 다섯짤
다섯 살이라고 세상을 순수하고 아름답게만 바라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아이답게 꾸밈없는 직설화법은 현자의 격언보다 더 통쾌하게 가슴에 꽂힐 때가 있다.
그래도 10살짜리 태양이는 제법 하얀 거짓말을 할 줄 알아서 나이 먹는 데 큰 위로가 된다. 이제 아이는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과 엄마가 다른 급(?) 외모의 소유자라는 것을 진작에 눈치 챘다.
아이 표현을 빌려 여기 말하자면 '엄마는 아무래도 티비 속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정말 조금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최애 반찬인 잡채가 식탁 위에 오르는 날이면 태양이는 그 고마움을 이렇게 보답하곤 한다.
태양 : 엄마 나 한 번 봐봐.
"응, 왜?"
태양 : 이야...진짜 예쁘다. 엄마는 어쩜 이렇게 화장을 안 해도 예뻐?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아마 엄마일거야.
아이가 '엄마 나 좀 봐봐' 스킬을 시전한 것이다. 아이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것이 이 스킬의 포인트다. 그런 다음, 미모 칭찬을 연달아 두세개 정도 하고나면, 나는 마지못해 '에이 말도 안돼~'하며 웃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기술은 가끔 풀 죽은 엄마를 위로해주고 싶을 때에도 종종 쓰인다. 저 위에 쓴 3종 콤보(예쁘다/민낯 칭찬/월드클래스 미녀)보다 더 장황한 미모 찬양이 흘러 나오면,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은 아이의 필사의 의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뻔한 거짓말에 몇 번을 당해도 매번 신선한 웃음이 난다. 어쩌면 나는 나이만 먹었지, 이런 면에 있어서만큼은 아이 손바닥 위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겐 언제나 투명한 혜성이가 있다. 태양이가 나를 우주까지 날려 보내면 혜성이는 다시 차분하게 나를 지상으로 끌어당긴다. 겸손의 미덕은 그렇게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혜성 : ???? 예쁘고 싶으면~ 엄마, 빨리 화장하고 와. 그래야 이뻐.
천진난만하도록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날카롭게 진실을 이야기한다.
태양 : 아니거든? 화장 안 해도 이쁘거든?
혜성 : 아닌데...? 엄마는 화장해야 이쁜데?
이런 식이다.
오늘 저녁에도 혜성이는 투명했다.
우리 부부는 소파에 기대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 앞에서 같이 티비를 보고 있었다. 티비에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서현이 말한다. "다이어트 힘들었죠? 이게 도와줄 거예요." 택연이 바톤을 이어 받는다. "전 이걸로 해요. 비주얼이 살잖아요." 마지막은 신봉선의 진심어린 한 마디. "정말 도움되더라고요."
의미없는 30초가 흘러가는구나 싶을때, 혜성이가 우리를 돌아보며 이야기한다.
혜성 : 엄마, 아빠도 저거 사~
아빠 : 아...저거? 저거는 건강식품이 아니야~ 살 빠지게 도와주는 다이어트 약이야
속으로 나도 남편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이구... 벌써부터 효자 노릇을 하네? 건강식품인 줄 알고 몸에 좋은거 먹으라고 그러는구나~(흐뭇)'
그런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초연한 대답이 이어졌다.
혜성 : 어~ 그러니까 사~
엄마 : 아,진짜? 엄마... 살 빼라는 뜻이야?
아빠 : 아빠 다이어트 해야 돼?
아이는 답답하다는 듯, 그러나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혜성 : 살빼.
살빼
그 단호한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게 배가 나왔나, 살이 그새 많이 쪘나, 못생겨졌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운동하자는 무언의 약속을 나눴다.
그래도 왠지 섭섭해서. 아이에게 다시 운을 뗐다.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아이가 '아니야 괜찮아. 안 날씬해도 돼. 지금도 좋아'라고 말해주길 내심 기대하면서.
"혜성아 근데 엄마랑 아빠가 날씬했으면 좋겠어? 왜~?"
혜성 : 음 그러면 약간 (건강이) 좀 더 좋아지고 그러잖아.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다면 효자가 맞긴 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