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솔 Jan 22. 2023

피가 아닌 잉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가기.


타투를 새겨야겠다.

어떻게든 상처를 내고 싶다면 피가 아닌 잉크를 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나는 이제 타인에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두렵다.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해줄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에 담긴 나의 마음이 왜곡되진 않을까

'힘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대부분의 사람은 모를 거다.

위로라고 생각할 거고

응원이라고 생각하겠지.

이해한다, 공감한다는 의미로 건네는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으면 어쩐지 온 몸이 아리다.


언젠가 나 역시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괜찮아지겠지, 어른이 되고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우울도 다 마르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어른이 되고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내 세상은 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유별날 것 없어 보였다.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그게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유별날 것 없이 안정적이고 조용한 날들을 살아가자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사사로운 것들로 웃고 어김없이 내일을 맞이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실로 그렇게 사는 듯 했고.


몇년 전 일기에 '아프고 싶다' 라고 쓴 적이 있다.

아파야할 것 같고

아프면 살아있는 것 같고

아픈 것이 나와 어울리는 삶이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는 아픔은 스스로 상처를 내는 일과 가장 가까웠다. 찢기고 쓰리고 아린 통증.

맞고 자란 아이들은 결국 삶을 견디고 버티는 형태로 밖에 살지 못하게 되는걸까? 안온한 삶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해버리는, 가장 가까운 가해자가 되는 것일까? 어른이 된 나는 맞아 죽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던 시기를 불행하게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나, 어쩌면 그것이 가장 단순한 삶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이어지긴 하는 걸까? 끊임없는 무기력을 동반하는 이 삶을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게 과연 나를 위한 일일까? 느리고 더딘 삶이라도 아껴주고 싶었다. 나만큼은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쓰다 보니 웃음이 나네.


몇일 전, 친구가 물었다.

"진솔은 진솔을 사랑해?"

나는 망설임없이 "사랑하지"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자연스러울만큼 반사적인 대답이었다. 정말인가? 나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답할만큼 사랑하는가? 그리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 해도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라고.


죽지 않을 거다.

자해도 하지 않을 거다.

본가에 다녀온 연인을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고

결국 죽기보다는 고통을 겪기 위해 상처를 내는 것일테니 스스로 가한 폭력의 잔해물들이 남겠지.

그 뒷처리를 하고 싶지도 않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상처를 내고 나면, 결국 붕대를 감고 다니며 약을 바르며 상처가 무사히 아물기를 바라겠지.

그게 마치 사랑인 것처럼, 나를 돌보는 일이라 여기며 끔찍한 굴레로 돌아가게 될거야.

그러고 싶지 않다.

머리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이론적으로 나의 감정과 생각은 순간이자 오랜 우울의 상흔일뿐이다.


이 글을 다 쓴 후에는 타투할 곳을 찾아보고 예약 문의를 넣을 거다.

자해를 통해 고통을 전시하고 싶지 않고 그를 통해 인정받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고통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폭력이니까.

스스로를 향한 폭력에 제동을 거는 법을, 나는 알고 있다.


살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다고 몸에 새길 거다.

느려 터진 삶이라고 해도

남들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삶이라고 해도

죽음이 제 발로 걸어올 때까지 살겠다고.


앞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어디로 이어지는 지 모르겠다고 썼다. 그래 모른다. 모르지만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을까? 죽지 않고 산다면 결국 어딘가에 닿고 말 지금의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령 그 끝이 아주 못나고 미약하다고 해도 기꺼이 내 시간을 살아낸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못나고 미약하지 않을 수도 있고.


-

어제 오늘 총 4권의 책을 읽었다.

신기하게도 전부 죽음에 관한 책이었다.

이럴 때면 '기'라는 게 실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예전이었다면 죽어라고 죽어라고 이런 책만 읽나 싶었겠지만, 이제는 이게 세상이 내게 건네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한다.


너만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게 아니야, 죽음은 결국 오게 되어 있으니 너무 바라지 말아,

그냥 되는 대로 되는 만큼 살아가, 죽지 말고.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이 버거운 이유는 나에게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