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아프가니스탄 특파원 '클라리사 와드'
자전거 자물쇠를 변형한 채찍 모양의 무기를 들고 불특정 사람들을 향해 휘두르는 한 남자가 카불 공항으로 가는 길목을 취재하던 CNN 기자에게 무어라 대답한다. 아마도 남자는 탈레반일 것이다. 현지어로 말하는 남자에게 계속 영어로 질문하는 기자. 옆에서 말을 전하던 현지인 통역사(또는 탈레반 측 인사) 갑자기 다급한 듯 손을 내밀어 기자에게 말한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답니다.
긴급한 상황의 공기가 잘 느껴진다. 총을 든 사람들로 가득한 길에선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특파원으로 오랜 시간을 일해 온 기자는 금세 눈치를 챈다. 그리고 주저없이 자리를 뜬다. 가는 길에도 몇 번 씩이나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필사의 탈출이 이뤄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아비규환이다. 단 하나 남은 출구는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이다. 미군 수송기체 외부를 잡고서라도 나라를 탈출하려는 아프간인들은 차를 타고, 걸어서, 뛰어서 공항으로 향한다. 뉴욕타임스가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공항 가는 길'을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도식화 했다. 민간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입구는 이미 탈레반이 장악한 상황. 군중 밀집을 막기 위해 총을 쏘고 있고, 몇 명은 그 총에 맞아 이미 죽기도 했다.
기자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자신이 미군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며 각종 서류 꾸러미들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어떻게 하면 공항으로 갈 수 있냐고 필사적으로 물어본다. 카메라 영상으로 그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긴다.
너도나도 기자에게 질문 세례를 퍼붓자 거리를 지키고 선 탈레반들이 흥분한다. 군중들에게 물러나라고 총구를 들이민다. 잔뜩 화가 난 탈레반들에게 CNN 기자도 위협당하고, 결국 차를 찾아 떠난다. 휴대전화로 촬영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탈레반들이 당장이라고 총을 휘두르려 했고, 옆에 있던 다른 탈레반이 "그들은 기자들이고 보도를 허락받았다"고 간신히 뜯어말린 뒤에야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안전지대에 도착한 클라리사는 그제야 앵커에게 "명백한 뉴스 크루였음에도 위협당한 걸 보면 일반 아프간 현지인들이 탈레반의 포위를 뚫고 공항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에겐 희망이 없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꿈쩍도 않고 현장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 여성 기자, 클라리사 와드에게 단연 눈길이 간다. 카불 함락 이후에도 시시각각 악화하고 있는 치안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며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전달하고 있다. 누구보다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며 CNN의 저력을 이렇게 몸소 증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클라리사 와드는 1980년 출생의 미국인 방송기자다. 현재는 CNN에서 해외 특파원 선임 기자로 있는 꽤 직급이 높은 기자다. 커리어를 레바논 베이루트와 아프가니스탄 바그다드 주재 폭스뉴스 특파원으로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 주재 ABC 뉴스 특파원을 거쳐 CBS로 이직했고 2015년 9월 CNN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링크한 CNN의 영입 공지에 그녀의 자세한 이력이 나와있다. CBS 간판뉴스인 <60 Minutes>를 비롯해 <CBS Evening News>에서도 해외 소식을 전했다. 2015년까지도 시리아, 이라크, 예멘과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8년 간 특파원 생활을 이어갔다니, 탈레반의 총구 앞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않던 '강심장'이 어디서 왔는지 이제 알겠다.
시리아 내전을 다룬 기사는 그녀에게 피버디, 듀폰상과 함께 두 개의 에미상, 머로우상의 영예를 안겼다. 세계적 권위를 가진 기자상을 모두 휩쓴 것. 예일대학을 졸업했고 무려 6개 언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CNN 이력서에 썼을 내용이니 아마도 팩트겠지. 될 성 부른 나무는 역시 떡잎부터.. 미들버리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도 수여받았다.
그녀의 커리어가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이 본격화된 2003년부터니 사실상 중동 지역의 전쟁과 착취의 역사에 대한 전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와드를 보며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2018년 CNN에서 아만푸어의 직급을 물려받아 'chief' 보직을 달게 되었다.
국제팀에서 CNN을 모니터하면서 와드가 카불 점령 전부터 탈레반 동향을 취재하고 있다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는데, 찾아보니 와드와 탈레반의 인연은 훨씬 이전부터였던 것 같다. 2019년 서양인 기자 최초로 탈레반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취재한 기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래서인지 미국 내에서는 연일 활약을 펼치고 있는 와드에 대한 비판도 있다고. 한 미국 야당 의원은 탈레반이 와드의 취재에 협조하고, 또 해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라뽀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CNN은 미국의 적을 제대로 비판한 적이 없다"고 혹평을 내놨다고도 하니, 입맛에 맞지 않은 언론을 공격하는 버릇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슷한 것 같다.
와드는 중동 지역만 전문가도 아니다. 2020년에는 러시아 야권 운동가 나발니를 러시아 정보당국이 수 년 간 스토킹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탐사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독일 언론 슈피겔과 합작한 작품이다. 이런 걸 보면 각자 내놓을 수 있는 소스들이 풍부하니 유망한 언론들끼리 제휴를 통해 합작 탐사보도를 하기도 하는 게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기야 어디나 뜻 맞는 동료들만 있으면 함께 일할 수 있으니까.
2007년 모스크바 저녁 파티에서 만난 펀드매니저와 2016년 결혼해 각각 2018년과 2020년 자녀 2명을 두었다고 한다. 우리 나이로 2세, 1살이다. '워킹맘'이다!
여성 인권 탄압으로 혹독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탈레반을 일선에서 가장 가깝게 취재하고 있는 기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정말 고무적이다. 중계나 방송하는 장면들이 너무나 여유롭게 느껴져 팀 선배들과 카불 함락 직전까지 "별로 안심각한 모양인데?"라고 이야기도 나눴다.
자신을 위협하는 탈레반 남성들을 향해 슬쩍 쏘아댄 경멸의 눈빛, 절제된 감정을 담은 리포팅 모두 배울 점이 많은 선배 기자다. 언제 철수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도 알겠지. 자신이 어떤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