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학교에 전형적인 파란 눈의 스위스 남자 둘이 있다. 한 사람은 185cm 키에 갈색 머리이고 다른 한 남자는 170cm 정도의 금발이다. 둘은 비자 문제로 우리와 똑같이 수업을 듣는다. 호주에서는 이처럼 겉으론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나는 핸섬한 얼굴에 안경을 쓴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키 큰 남자가 좋았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심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다 외계인 같았다. 아마도 흥선대원군의 피를 모조리 다 이어받았는지 대단히 싫어했다.
그런데 영어를 배우고 나서는 외국인이 그냥 좋았다. 뭐 연애를 한다던가 손을 잡는다던가 키스를 한다던가 깊은 관계로 발전하고 싶진 않지만 영어를 쓰는 그들이 좋았다.
이태리 남자는 목소리도 크고 굉장히 수다스러운데 위의 두 남자는 달랐다. 말이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컴퓨터 프로그램 소스 창을 뛰우고 자판을 두드렸다.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은 일했다. 앞에서 수업하는 인도 선생님을 대단히 무시했다
상관없었다. 나도 그들을 존중하는 입장이 아니니까 선생도 학생도 서로를 무시한다 나는 파란 눈과 매주 같은 시간에 보니 정이 들었다.
학교에는 정규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 감독하에 자율 보충 시간이 있었다. 난 그 시간을 활용했다. 숙제도 어렵고 첫 학기 때 낙제를 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보충 시간에 앉아서 숙제를 하고 감독 선생님께 숙제를 물어보며 알차게 문제를 풀어 나갔다.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스위스 남자가 자율학습 교실에 남아 본인의 일을 하고 있었다. 기회다 생각하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었고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몇 마디 걸었다. 숙제가 어렵다 뭐 시답잖은 얘기를 꺼내자 그의 파란 눈이 빛나면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뭐 다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문제의 해답을 얘기한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나가서 커피 한 잔을 하자고 제안했다.
좋은 날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책가방을 싸고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가을바람과 청명한 하늘이 나를 반겼다. 그가 사 준 카푸치노를 마시며 알 수 없는 영어에 싱글벙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별 말은 안 했지만 그의 반짝반짝 빛나는 파란 눈이 좋았다. 커피숍을 빠져나와 신호등 앞에 서자 그가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 내 폰은 오는 연락만 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가 유료 유심칩을 구입하면 그만이다.
이제 곧 방학이다. 즐겁게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커피 잔을 들고 신호등에서 나란히 그와 섰다. 흥분되고 설레는 이 기분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연애를 먼저 시작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영어가 너무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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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You need a friend."라고 했다.
난 갑자기 모든 감정이 평정을 찾았다. 한참을 어린 남자한테 "You"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나는 작별 인사도 없이 휙 하고 돌아서서 지하철을 탔다. 까닥 없이 'You'가 싫었다. 난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혼자인 이대로가 좋다. 사랑이라는 달달한 감정이 덧없을 때가 있다. 믿기기 어렵겠지만 현재 그렇다. 그 뒤로 그가 문자를 보내왔지만 자연스럽게 무시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