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초상
사랑하는 사람을 잊으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아마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들을 눈앞에서 안 보이게 하는 것 아닐까. 그와 함께 찍은 사진, 그에게 받은 선물들과 편지들, 어딘가로 놀러 가서 산 기념품 등. 상자에 모두 넣어서 테이프로 칭칭 동여매서 집 밖에 버리고 뒤돌아 서는 것.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도 안 보인다고 믿는 것처럼.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잊기 위해 관련된 모든 물건들, 심지어는 '클레멘타인'에 대해 쓴 일기와 '클레멘타인'을 그린 그림까지 그러모아 종이 상자에 거칠게 넣는 장면. 그리고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까지 지우기 위해 그 상자를 들고 대기실에 앉아있는 장면. '조엘'의 양 옆에는 각종 물건들을 가득 담은 상자를 끌어안고 심드렁한 표정의 어느 남자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았던 '클레멘타인'의 흠결이 '조엘'은 불편해지고 결국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기억을 지워가며 '조엘'은 뒤늦게 깨닫고 만다.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느낀 흠결은 어느 순간엔 '조엘'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고, '조엘'은 그 모습을 몹시도 사랑했다는 것을.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친숙하고 애틋한 마음이 들어서 나를 덮은 옷과 사물들을 하나씩 짚어보니 그와 관련된 추억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문득 평소에 맨 손으로 다니는 그가 염려되어, 오늘은 날씨가 너무 추우니 꼭 내가 선물로 준 장갑을 끼고 나오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손은 손끝이 살짝 닳은 두툼한 가죽장갑으로 덮였다. 난 그의 두툼한 손안에 내 손을 살포시 밀어 넣었다. 그의 가죽장갑과 손이 닿으니, 우리가 매해 함께 했던 추운 겨울날들의 추억이 내 손에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만약 우리가 한번 더 해본다면, 이번에는 다를 거야.
It would be different... if we could just give it another go around.
그럼 나를 기억해 줘. 최선을 다해줘. 그럼 가능할 거야.
Remember me. Try your best. May be we can.
- 이터널 선샤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