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소이 Dec 28. 2023

그의 방에서

- 사랑의 초상

 매우 춥거나 사람이 붐빌 것 같은 날엔 추위와 사람들을 피해 그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지하철역에 마중 나와있는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면 그가 다가와서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내 손을 넣었다. 우린 그의 자그마한 주머니 안에서 손을 잡았다 풀었다 하면서 둘 만 아는 장난을 치며 나풀나풀 걸었다.


 그의 집까지 가는 길은 길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나에게 조금 험난했다. 다세대 주택이 양옆에 밀집해 있는, 비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다 보면 여러 주택 사이에서 그의 방이 있는 빌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찾아갈 수 있으니 집에서 편히 쉬고 있으라고 말하는 나의 말을 듣고서도 언제나 지하철역까지 나와서 기다렸던 걸까.


 내가 오기 전 그가 데워놓았다는 방은 온기로 가득했다. 외투를 벗고 포근한 이불로 몸을 덮으니 금세 몸이 훈훈해졌다. 우린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라디오로 90년대 유행하던 노래들을 들었다.


 "배고프지, 저녁 만들어 줄게."


 그가 이불속에서 스르르 몸을 빼더니 냉장고에서 신선한 야채와 냉동 새우를 꺼냈다. 재료들을 손질해서 프라이팬에 넣고 일인용 하이라이터를 켰다. 그의 뒤에 서서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찬장에 있는 그릇을 꺼내려고 위로 손을 뻗자, 나의 고개도 그의 손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무얼 꺼내려나 궁금해하고 있을 찰나, 눈앞이 번쩍이며 턱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가 손을 위로 뻗으며 몸이 뒤로 기울자 그의 어깨뼈가 내 턱과 부딪친 것이다.


 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턱을 부여잡았다. 그가 깜짝 놀라 불을 끄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자 그는 미안해하면서도 이 상황이 어이없게 웃기다는 듯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주방이 너무 좁아." 내가 울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며 "그렇지. 너무 좁지."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엌은 세 걸음 정도 되는 자그마한 크기였다. 난 현관과 바로 붙어 있는 부엌과 그의 방을 나누는 미닫이 문 바로 뒤로 자리를 옮겼다. 그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부엌에 몸을 들이지 않고 팔만 쏙 내밀어서 그의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재료를 건네받았다.


 우리는 그날 저녁으로 새우볶음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고 설거지를 한 후, 소화를 시킬 겸 라디오 음악에 맞춰 가벼운 율동을 하며 방을 돌았다. 그가 세간을 늘리지 않아서 방은 꽤 깔끔했고 성인 둘이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되었다. 춤을 추고 노곤해지자 다시 매트 위에 나란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아까의 충돌 사건을 얘기하며 웃었고, 그는 내 턱을 살살 매만져 주었다.


 좁고 작은 그의 방,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 옆에 딱 붙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춤을 추다가 다시 나란히 누워있는 방. 포근한 기분으로 그의 방에 누워서 생각했다.


 언젠가 지금보다 더 큰 방에 나란히 누워 이렇게 얘기할 것 같다. '그때 우린 그곳에서 한없이 웃고 얘기하고 서로를 안아주었지.' 그 자그마한 방에서 누렸던 시간과 감정이 계속 그리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