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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비 Jan 29. 2021

내가 겨우 나를 키울까 봐

아이를 키운다는 두려움에 대하여

임산부에게 28주는 특별하다.



입체 초음파를 통해 처음으로 아기 얼굴의 윤곽을 볼 수 있는 주이기 때문이다. 28주 이전엔 아이가 너무 작아서, 28주 이후엔 아이가 너무 커져서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하니, 임신 기간 중 거의 유일하게 아기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나 또한 우리 아기의 얼굴을 처음 본다는 기대감으로 28주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아이가 뱃속에 있으면 어떻게 생겼을지 너무너무 궁금하다. 누굴 닮았을까? 얼마나 귀여울까?


나에게도 찾아온 28주 정기검진 날.

초음파 선생님이 기본적인 아이 크기를 먼저 재어주셨고, 곧이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아기 얼굴을 보여주실 차례가 되었다. 화면상 처음에는 찰흙을 뭉쳐 놓은 듯 밋밋하게 둥그런 형태가 띄워져 있었는데, 선생님의 조작에 의해 조금씩 깎여 나가며 눈코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 어어...?? 저거 내 얼굴 아냐???


나는 당황했다. 보통 딸은 아빠를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어째서 내 얼굴이, 우리 오빠의 얼굴이, 하물며 우리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거지?

더 당황스러운 것은, 아이가 나를, 우리 식구를 닮았다는 데에 내가 본능적으로 엄청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나를 닮았으면 좋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의 미니미라면 당연히 더 사랑스러워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나는 딸아이가 나를 닮지 않기를 바랐다는 걸 초음파실 침대 위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나를 위해 여러 각도로 틀어가며 아기 얼굴을 보여주시는 초음파 선생님의 손목을 잡고, 이제 그만하시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다고 아빠를 닮았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개미씨가 적절한 외모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애초에 예쁘냐 못생겼냐의 차원이 아니었다. 이건 뭐랄까, 누굴 닮았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라, 그저 다른 누구든 좋으니 나만은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나를 닮는 것이 두렵다,는 마음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자존감이 낮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인 걸까?           


그렇게 가슴 벅차야 할 28주 입체 초음파는 해석 불가한 내 미묘한 거부반응과 그에 대한 당황감에 잠식당한 채 끝이 났다. 초음파실을 나오는 길에 내 키를 훌쩍 넘는 길이의 초음파 사진을 받았다. 30여 분간 관찰한 뱃속 아기의 몸 이곳저곳의 모습이 출력되어 있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내 얼굴이, 아니 아기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쪽으로 사진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뭐에 한 방 맞은 듯이 뒤통수가 얼얼했다. 입체 초음파를 보며 처음으로 ‘아, 이 아이, 내 유전자로 만든 내 아이구나’ 하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좀 많이 놀랐던 걸까? 나는 막연히 이 아이가 어디 저기 먼 나라 별에서 온, 나의 몸만 빌린 아주아주 다른 사람일 거라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초음파실 침대에 누워 내가 반복적으로 떠올린 것은 김애란의 소설 ‘서른’(비행운, 문학과 지성사)의 이 한 구절이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소설 속에선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보습학원 강사가 학생들을 보며 하는 생각이지만, 나에겐 딸을 보는 나의 두려움을 관통하는 문장으로 다가온다. 내가 겨우 나를 키운다는, 그래서 나의 작은 그릇만을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도, 멋있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귀하디 귀한 너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공포. 최선을 다해 빚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겨우 나만 할까 봐. 네가 가지고 있는 넓고 넓은 우주를 나의 무지한 손으로 접어 버릴까 봐.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어난 아이의 얼굴은 초음파와는 많이 달랐다.


나를 그렇게 닮지는 않았고, 아이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아빠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이의 눈매에서, 입가에서, 문득문득 내 어린 시절 얼굴이 스치기도 했다. 자라면서 어쩌면 나를 더 닮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인 것은 그것이 초음파로 아이의 얼굴 속 나의 기원을 처음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그 날처럼 괴롭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건 아마도 아이가 태어나 나의 품에 안기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는 우리 두 명을 조금씩 닮았지만 그 자체로 온전했다. 개미 씨도 아니고 나도 아닌, 하나의 완벽히 새로운 존재였다. 나를 닮은 부분(마음에 안 드는)이 조금 있다고 해서 안타까워할 만큼 작은 존재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모처럼 낳은 아이가 겨우 나일까 봐 우려했던 나의 오만한 걱정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본능일지언정,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하품을 하고 방귀를 뀌고 배가 고파 우는 이 아이는 결코 작은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는 아이만의 세상을 살아나가며 자신의 그릇을 스스로 넓혀가리라는 것을, 그것이 내가 아닌 이 아이의 몫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꼈다고나 할까.


이로써 입체 초음파를 보며 느껴졌던 정체모를 불안감은 이제 잦아들었다.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은 아직, 여전히, 잔뜩, 아마 앞으로도 계속, 남아있겠지만 나는 나대로의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이 맑고 영특한 아이가 우리에게 건네는 크고 작은 속삭임에 귀 기울이다 보면, 아이도 우리도 매일 조금씩 더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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