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8일의 일기
습관성 유산이라는 말은 누가 붙인 것일까.
손톱을 물어뜯거나 다리를 꼬고 앉는 것들이나 습관인 줄 알았지, 유산도 습관일 수 있다니.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단어가 '유산'앞에 붙으니 참 잔인하게 들린다. 유산을 직접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무심하게 작명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습관성' 유산이라는 말 대신 어떤 다정한 단어를 골라 붙인다한들, 그 단어에 상처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몇 번이나 잃었는데.
의학적으로 습관성 유산은 3회 이상의 유산을 말한다. 의학적인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습관성 유산의 검사에 있어 유산 횟수에 따라 의료보험 적용 여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 2회 유산이기 때문에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의료보험 혜택을 받자고 유산을 한번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노산의 문지방을 밟고 있었고, 더 이상 유산으로 몸과 마음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소니를 보낸 후 당장 습유 검사를 받아보겠다고 했고, 피를 몇 통이나 뽑았고, 그리고 오늘, 드디어 검사 결과를 듣기까지 2주가 걸렸다.
어디가 안 좋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보다, 특별한 원인이 없고 모든 게 정상이라 나오는 것이 더 두려웠다. 어쨌든 원인이 있어야 고칠 수도 있을 테니까. 아무런 이유가 없다라면 되려 막막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 몸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다고 할까 봐 그것도 무섭고. 여러모로 긴장된 마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원인으로 의심되는 몇 부분이 나왔다.
Protein S activity (S 단백질 수치)
수치가 낮을수록 혈전이 잘 생긴다고 보면 된다고 한다. 65%가 정상범위 하한치인데 나는 60%이었다. 확실하게 처방이 필요한 것은 50%대 정도라 나는 약간 경계에 있었다. 좀 더 정확한 결과를 위해 채혈을 한번 더 하기로 하고, 결과상 S 단백질 결핍이 확실해지면 나중에 임신했을 때 헤파린 주사 처방이 나갈 것이라고 하셨다.
MTHFR 유전자 / 엽산대사이상
쉽게 말해 엽산을 먹는 만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CC형이 정상, 하나가 이상이 있으면 CT, 둘 다 이상이 있으면 TT라고 한다. CT형부터는 기존보다 훨씬 고용량의 엽산을 섭취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평소 800짜리를 한 알씩 먹다 요즘 2알로 늘렸는데 그보다도 더 높게 2,000짜리를 처방해주셨다. 임신 준비 시작할 때쯤 엽산 먹으라 소리를 하도 들어서 반감이 생길 정도였는데, 난임을 겪어보니 엽산은 정말 정말 중요하다. 기형아 예방은 물론이고 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영양소이다.
자연살해세포(NK cell) 수치
습유 검색하면 제일 많이 뜨는 NK cell수치. Natural Killer cell의 약자이고 우리나라 말로는 자연살해세포라 한다. 다소 무시무시한 단어이지만, NK cell은 우리 몸에서 자가면역을 담당하는 좋은 녀석이다. NK cell 수치가 높으면 암에 잘 안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자궁 속 배아마저 제거해야 할 외부 바이러스로 인식해서 유산의 확률을 높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습관성 유산 환자들은 보통 NK cell 수치가 높은 경우가 많았는데 나 역시 이 부분이 조금 높게 나왔다. 12%까지 정상으로 보는데 나의 경우는 17.4%였다. 보통 높다, 하면 20% 대도 나온다고 하니 나 정도면 엄청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산에 영향이 있을 법한 수치기는 하다고 하셨다.
이외에 염색체 검사, 갑상선 수치, 항인지질항체, 자가면역질환은 정상으로 나왔다.
병원 온 김에 본 초음파상 나의 난소들은 지금 전혀 배란 준비를 안 하고 있어서 생리는 7월쯤에나 되어야 할 듯한다신다. 세 번의 생리를 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마음이 급하시니(나의 좌절하는 표정을 보셨다 ㅋ) 두 번째 생리 때 자궁 상태를 보고 괜찮으면 다시 인공수정을 시도해보자고 하셨다. 8월까지는 임신 휴가 인 셈. 작년 유산 후로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임신에 몰두했었는데 오랜만에 마음 편히 보낼 수 있다니 한편으로 좀 홀가분하기도 했다.
검사 결과 듣기 전엔 혹시나 염색체 문제가 아닐까 제일 걱정되었다.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염색체에 문제가 발견되면 시험관밖에 답이 없고, 그나마도 수정된 배아를 모두 조직 검사해서 문제가 없다고 확인된 정상배아만 이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근데 이 배아검사가 금액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배아 하나에 25만원 정도. 더구나 나는 다낭성으로 난포가 무럭무럭 자라는 편이다..... 물론 건강한 아이가 오기만 한다면, 생각하기는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그런 검사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을 죽이며 또 맘 졸일 것을 상상만 해도 한숨이 난다. 가능하면 시험관보다는 다시 한번 더 인공수정을 하고, 성공한다면 적극적인 습유 처치로 임신을 유지하고 싶다.
그렇지만 임신 준비하면서 내 생각대로, 원하는 대로 절대 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달까. 희한하게 계획하면 안 되더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무계획으로, 천천히 천천히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