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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비 Oct 21. 2020

소파수술 후의 나날들

2019년 6월 5일의 일기

소파 수술한 지 이제 2주가 되어간다.



수술 다음날은 마리아에 가서 소독을 받았다. 선생님이 초음파상 대부분 깨끗하게 잘 빠진 것으로 보인다며 원래라면 일주일 뒤 확인을 위해 내원해야 하는데 나는 그걸 건너뛰어도 될 듯하다고 하셨다.


수술 후 한 4일 정도는 생리처럼 피가 나왔다. 통증은 첫날과 이튿날이 제일 심했고 이후론 괜찮았다. 진통제를 따로 먹지 않아도 될 만큼. 3일간 잔여물 배출을 위해 싸이토텍을 복용했는데 약을 먹고는 수축통이 좀 있어서 불편했지만 월요일부터 평소처럼 출근하고 일상생활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서 오히려 이상했다. 심지어 그냥 좀 늦은 생리라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5-6일째부터는 양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약간의 하혈이 있었다. 적은 양이어도 새빨간 색이어서 좀 염려스러웠지만 그것 말곤 통증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라 두고 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냉과 섞여 나왔다. 컨디션은 여전히 좋아서 내가 유산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8일째 아침엔 처음으로 휴지에 피가 묻어나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끝인가, 싶어 해 본 임테기는 그러나 여전히 두 줄이다.                                               


                                                                         

저 정도면 피검수치는 30 쯤 되려나. 뱃속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도 이 호르몬이란 것은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는 거구나. 저 두 줄을 보려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지금은 하루빨리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난임이면 난임이고 습유(습관성유산)면 습유지, 나는 어째서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번 주 토요일에 검사 결과 들으러 가는데 시간이 참 안 간다. 임신 준비하면서는 정말 매일이 기다림의 연속이고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간다. 그러나 뒤돌아 보면 어느새 올 한 해도 반이 훌쩍 지나 있어 덜컥 겁이 나고 조급해진다.                                               


                                                                                                                                            


수술 후 11일 째엔 L이 알려준 약방에 찾아갔다.


L 신랑이 비염이 있는데 여기서 약을 짓고 많이 좋아졌다고, 한의원은 아니지만 경험 많은 약방 할아버지가 나름 맥도 짚고 이런저런 얘기도 해준다고 했다. 사실 전화번호 받은 지는 오래되었는데 마리아 다니면서 한약을 병행할 수는 없어서 묵혀놨었다. 마들역의 ㄱㅈㅊ한의원이 유명하 다해서 거기를 가볼까.. 사람이 너무 많아 주말엔 몇 시간 기다리는 게 기본이라던데.. 하고 고민하던 차에 여기 생각이 났다. 생각이 나니 당장 실행에 옮기고 싶어 근무 중에 당일 방문 가능한지 전화드렸는데 6시까지 갈 수 있다 하니 문 닫는 시간이지만 기다려주시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연세가 있으신 듯했고, 내가 괜찮다는데도 제기역 앞까지 굳이 마중 나오신 모습은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도 더 연세가 많아 보이셨다. L이 정정하다, 표현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중절모와 시원한 블루톤의 린넨자켓을 멋스럽게 입고, 제기역 지하철 출구 앞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계셨다. 내 얼굴도 모르시면서.. 하하... 더구나 나는 늦을까 봐 택시를 타고 갔더랬다.



약방 한 켠 좁은 사무실에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이름을 물어보시고 결혼 여부를 물으시기에 유산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 말에 다른 건 자세히 보지도 않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약을 지어야 한다고 하시며 몇 가지 약초를 읊으셨는데 귀에 설어 기억은 잘 안 난다. 익모초, 당귀 등을 말씀하신 것 같다. 맥을 짚어 보시곤 맥이 약하다셔서 놀랐다. 솔직히 수술 후 이렇다 할 불편함이 없이 오히려 몸이 가뿐해진 느낌이라 그냥 요란한 생리를 겪은 듯 하기만 한데, 내가 내 몸을 모르는 건지 할아버지가 유산했다는 나의 말에 지레짐작하신 건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유산도 출산과 똑같다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씀을 하셨다. 그보다는 진짜 나의 상태나 체질 같은 것을 보고 이것저것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집어 주실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유산 이야기를 괜히 먼저 꺼냈나...? 뭐 어떤 소릴 듣던 몸이 따뜻해지는 약이 결론이긴 했을 테지만. 약값은 한 달에 16만 원으로 한의원보다는 싸서 비싼 영양제 하나 더 추가했다고 생각해보려 한다.


대화 말미에 할아버지가,

"몸 잘 추스르고 아기 낳으면 산후보약 지으러 또 와~"

라고 따뜻하게 말씀해주셨다. 아기 낳으면 다시 오라니,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할아버지는 별 뜻 없이 인사치레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되고 자신도 없어서 괜히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외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탕약 복용 시 주의점


하루에 두 번 아침저녁으로 식후에 먹기.

재탕한 묽은 탕 먼저 먹으면서 적응하기.

밀가루와 술 멀리하기.                                               



Hong Kong,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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