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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의그녀 Apr 13. 2020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사 '쇼코의 미소'

어떤 소설은 구원 같고, 어떤 구원은 소설같다. 

학부시절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름이 있었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가 그렇게 좋다는데, 읽을 여유가 나지 않아 미뤄두고 있던 차에 고속버스 터미널 안 서점에 들렀다. 단편소설 모음집이라 한 두편 정도는 읽을 수 있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다. 각오없이 책을 펼쳤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 유동인구가 많은 센트럴 고속터미널에서 민망할 정도로 펑펑 울고만다. 원체 눈물이 많긴 하지만 쇼코의 미소는 생전 겪지 못한 감정과 아픔을 건넨다. 마치 그 속에 내가 함께 살아있는 것처럼 문장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저려온다.


선천적으로 눈이나 위가 약한 사람이 듯이 마음이 특별히 약해서 쉽게 부서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 앞에 겸손히 귀를 열고 싶다고 최은영 작가는 등단 초기부터 말해왔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한 작가답게 쇼코의 미소는 착한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에 위로를 건넨다. 소설가는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아픔이 우리 현대사의 쓰라린 부분에서 기인할 때 그 서사는 공감으로 가닿는다.


소설가 김영하는 '오직 두 사람' 작가의 말에서 2014년 봄에 벌어진 참사를 두고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라고 언급한다. 김영하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이 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이 시대를 함께 겪은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에는 세월호와 인혁당 사건을 주제로 다루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 사건들 이후에 부서져 내린 삶을 사는 사람들의 버티는 시간을 서술한다. 주제넘은 위로도 없이, 과한 신파도 없지만 문장은 그 자체로 아프다.


쇼코의 미소는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 <한지와 영주>, <먼 곳에서 온 노래>, <미카엘라>, <비밀> 총 7편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7개의 이야기 모두 상실과 이별에 관해 다룬다. 그 중 다섯편의 단편은 현대사의 아픔을 버티는 최은영의 태도가 녹아져 있다. 


가장 좋았던 단편을 꼽으라면 역시 표제로 선정된 '쇼코의 미소'와 가장 마지막 장에 수록된 '비밀'이다.


'쇼코의 미소'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소유와 홈스테이 게스트로 방문한 쇼코의 이야기다. 쇼코의 등장으로 소유의 집안에는 활력이 돌고, 그 중 할아버지는 유독 쇼코를 아낀다. 일본으로 돌아간 쇼코와의 연락이 끊기자 주인공은 쇼코를 만나러 일본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180도 달라진 쇼코를 보게 된다. 


소유는 영화감독을 꿈꿨고, 쇼코는 도쿄라는 대도시로의 진학을 꿈꿨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누구 하나,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다. 쇼코의 미소에서는 관계와 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상한 경계에 놓여있는 관계들, 친구와 연인 사이에 놓인 관계, 남과 가족 사이에 놓인 관계, 이상하게 매듭진 관계들은 팽팽하게 묶여있다가 서사가 진행되면서 느슨하게 풀린다. 제 이름에 걸맞는 자리를 찾아간다. 


"반면 영화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늘 그들의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영감은 고갈되었고 매일매일 괴물 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알코올 중독자가 된 감독 지망생과,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하며 야근 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을 보며 내가 그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꿈과 재능에 관한 이야기도 풀어놓는데 처음에는 서슬퍼렇게 현실적이었다가 뒤에는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소유가 꿈에 관해 말하는 부분은 가슴에 바위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먹먹해진다.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많은 이들이 쇼코의 미소에서 좋은 챕터를 꼽으라면 쇼코의 미소, 그리고 미카엘리나 한지와 영주를 꼽지만 나는 마지막 장에 있는 비밀이 가장 좋았다. 


비밀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세월호 기간제 교사로 생을 마감한 손녀와 손녀의 죽음을 비밀로 하는 딸과 갑자기 손녀가 사라져버린 세상을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상실과 부재,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안에 사람에 대한 애정이 눅눅하게 묻어있다. 최은영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 절절하게 느껴진다. 남겨진 사람들도, 떠나간 사람들도, 세상을 사랑하는 게 소설가의 몫이라면 최은영은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게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 당하고 괴롭힘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비밀을 처음 읽은 지 근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슬픔에 잠긴다. 가끔 말자가 되었다가 지민이 되었다가 한다. 읽는동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상실에 관해 인상깊은 글귀를 봤던 적이 있는데 아마 강남역 살인사건 관련한 글이었던 것 같다. "네가 아기 때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으면 다칠까 입으로 물어서 손톱을 잘라냈어. 그렇게 키웠는데.." 세상을 온통 차지했던 사람의 웃음이 희미해진다는 일은 무슨 마음일까. 나는 아직도 이 비밀이 아프다. 


이 이후로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2017 젊은 작가상에서 한번 더 보게 된다. '그 여름'이라는 단편인데, '내게 무해한 사람'에 이 단편이 실려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을 살 충분한 이유가 되었고, 내게 무해한 사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쇼코의 미소가 아픈 현대사를 견디는 시간에 관한 서술이었다면 내게 무해한 사람은 조금 더 개인적인 관계로 들어간다. 최은영이 살아가는 시대도 바뀐만큼 그 시대상도 잘 녹아져있다. 전작보다 여성서사가 보다 노골적이어 졌다는 점인데, 기회가 되면 내게 무해한 사람도 리뷰하고 싶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다음작이 기다려진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던 최은영 작가가 써내려갈 근사한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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