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잖아.
"할머니 무릎에서 기분 좋은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야" 영화 윤희에게를 보게 된 이유는 딱 하나. 동원이의 추천사 때문이었다. 늘 보고 싶은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쉽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먼저 윤희에게를 본 동원이에게 어떤 영화냐고 물어봤더니 저렇게 예쁜 말로 후기를 말해줬다. 봐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추천사였고, 무드등도 고쳤겠다. 감정이 지칠대로 지쳐있던 나는 양질의 콘텐츠가 필요했고, 그렇게 지친 금요일 밤, 미루고 미루던 윤희에게를 봤다.
네 엄마는 뭐랄까 사람을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야.
영화는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엄마의 옛친구 '쥰'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한 딸 '새봄'. '새봄'은 '윤희'와 함께 편지를 보낸 사람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좋은 향기가 나는 편지를 보낸 엄마의 첫사랑이자 옛친구가 있는 곳으로. 영화는 초반에 '외로움'과 '윤희'에 대해 다룬다. 이혼한 남편을 통해서도 윤희와 외로움을 언급하고, 새봄이 아빠가 아닌 윤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외로움을 꼽는다. 윤희는 어떤 전사를 가지고 있기에 외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여행을 통해 새봄은 '쥰'과 '윤희'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는 '새봄'과 '윤희'의 로드무비를 다루면서 과연 '윤희'와 '쥰'은 재회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달려간다.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담는 배경은 홋카이도의 오타루다. 극중 '쥰'의 이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눈은 언제쯤 그칠까'라는 말처럼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펑펑 내린다. 온통 새하얀 배경에서 '윤희'와 '새봄'은 '윤희'에 대해 알아간다. 오타루까지 따라온 '새봄'의 남자친구도 간간히 나오는데 둘의 작당모의가 워낙 귀여워서 가끔 웃음짓게 된다.
'윤희에게'는 약자에 대한 영화다. 철저한 사회적 약자 '윤희'는 오빠와 달리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힌다. 윤희의 외로움은 스스로에 대한 벌을 주는 행위에서 기인한다. 첫사랑을 져버리고 오빠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벌. '윤희'를 보면 엄마가 떠오르고, 얼굴 모르는 이들의 사랑을 생각한다.
그치지 않을 눈도 언젠가는 그치고, 부치지 못한 편지도 언젠가 주인을 찾아가고, 꿈에서 만나던 이를 현실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것처럼 윤희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 역시 영화 말미에는 끝을 맺는다. 윤희는 오타루에서 돌아온 후 지방 생활을 청산하고 본인의 꿈을 위해 새봄이와 서울로 이사한다. 엔딩은 윤희가 꿈을 말하며 끝난다. 윤희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 꿈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윤희가 꿈에게 첫 발을 내딛으며, 영화는 그 첫 발을 응원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윤희에게는 꿈에 관해서는 닫힌 영화. 사랑에 관해서는 열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꿈을 찾아가는 것이 확실하니까 닫힌 결말. 윤희와 쥰에 관계는 이제 시작이니까 열린 결말.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서
윤희에게는 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윤희는 끝에 가서 꿈을 꾸고, 사랑을 마주한다. 많은 이들이 명장면으로 마지막을 말할텐데 나도 같다. 윤희의 마지막 나레이션이 살짝 웃는 듯하면서 슬픈 느낌이 좋다.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시절을 삼켰을까. 임대형 감독이 자식들을 통해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선은 늘 따스하다. 이름이 의미하듯 새봄은 기나긴 윤희의 겨울에서 윤희를 건져준다. 구원은 조용하고 따스하게 일상으로 다가온다. '윤희에게'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윤희'에게 '새봄'같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