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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조화 Oct 29. 2022

당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이유

당신의 꽃은 언제부터 피지 않았나요?

19세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수시 불합격.

21세 - 삼성디자인스쿨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불합격.

23세 - 연세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 편입학 불합격.

25세 - 졸업. 예술은 취미로 하자. 전공 살려 영어로 돈 벌기 시작.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의 사계절을 오롯이 느끼며 글쓰기와 꽃꽂이를 시작하고 난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난 훨씬 더 이전에 꽃 피우기를 멈추었다.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 사춘기의 시작 즈음부터 나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


가지치기 후 두 번째로 꽃을 피운 수국. 올여름에 이 녀석 혼자만 두 번을 꽃피웠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원대한 꿈이 생기는 순간'이나 '꿈이 결실을 맺는 것'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저 묵묵히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 원짜리 무지 연습장 한 권을 나만의 만화책으로 빽빽이 그리던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갈 즈음,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 이유가 예체능을 싫어하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는 착한 둘째 딸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또는 그림 잘 그리는 애로 소문이 나서 기세 등등했던 자아가 점차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훨씬 많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자아 분열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다시는 내 비루한 그림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리라!


그렇게 내 그림 실력은 딱 그 레벨에서 멈추었다. 레벨이 낮은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전쟁에 출전하지도 않았고, 전쟁 준비를 위해 무기를 가다듬는다거나 기술을 연마하는 수련을 하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까, 그림과 접점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러면서 적성검사를 할 때라든지, 관심 있는 대학교 학과를 고를 때라든지 할 때는 뻔뻔하게도 '미술 하고 싶었는데,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라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았다. 심지어 모든 일이 잘 안 풀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20대 초반엔, 살던 지역의 예술고등학교 학생이 입은 교복을 보고 아련하게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해서 이렇게 된 거구나, 예고를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 하면서.


꽃꽂이 시작 직전. 잘할 수 있을까 가장 두렵고 망설이는 시간.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본질을 잊은 것.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그림을 그렸었다. 칭찬받으려는 욕심 없이 그저 순수히 내가 좋아서 그렸었다. 그래서 조금 더 남들의 눈의 띄었을 뿐. 그런데 나는 이 본질을 잊었다. 남들이 내 그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중에 그림으로 먹고살려면 학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원치 않던 부모님에게 인정받으려면 그만큼 최상위권의 미술대학에 합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그저 내가 좋아서 그림을 그렸다는
그 본질을 잃어버렸고
더 이상 꽃 피우기를 멈추었다.


그림 연습도 하지 않으면서 간신히 찾아낸 비실기 논술전형 예술대학교 수시전형, 편입학 전형들에 지원해 모두 다 최종에서 미끄러졌다. 이렇게 노력 대비 성과가 커 보이는, 가성비 좋은 길만 찾아다녔다. 그 외 좋아하지도 않는 일들 또한 잘 해냈을 리가. 그렇게 서른 살이 넘도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저 먹고살아야 하니까 해야만 하는 일을 우선으로 살고 있다. 7시에 일어나서 집에 돌아오면 7시. 하루의 반 이상을 '내 인생에서 중요하진 않지만 급한 일'을 하느라 진이 다 빠진 나에게 '무기력'이라는 친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돈만 캐내는 생활이 8년 정도 되었을 무렵, 고층의 아파트에서 저층의 단독주택으로 이사 오게 된 나는 자연스레 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알리아가 보여주는 자연의 그라데이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주의 깊게 사계절의 사이클을 관찰한 적은 없었다. 약 1년간의 시간 동안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얻은 깨달음은 이것이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저 꽃을 피웠기 때문이라는 것.


뿌리를 내린 이 땅이 저 땅보다 비옥하지 않을지라도, 영양분이 부족해 꽃잎이 덜 자랄 것 같아도, 아무 불평 없이 그저 올해 피워야 할 꽃을 피워내는 생명들. 꽃 피우는 걸 멈추고 멀뚱멀뚱 누워있는, 이게 생명체인지 그냥 바위일 뿐인지 모를 나의 30년의 시간 동안 어떤 생명은 그저 묵묵히 30번의 꽃을 피워냈을 것이다. 자연과 가까이 살다 보니,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올해 내가 피울 수 있는 꽃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누구보다도 더 예쁜 꽃을 피우려고 조바심을 내다가 내 풀에 지쳐 아예 꽃 피우기를 포기했던 과거의 나와 닮은 사람들이 있다면,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분명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져 간신히 회사만 다니던 서른 넘은 직장인의 꽃꽂이 이야기는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열심히 꽃꽂이를 한 후, 그 꽃들은 일주일이면 시들어버릴 것이다. 깨끗한 물을 매일 갈아주지 않으면 더 빨리 시들 것이고 여름엔 곰팡이도 필 수 있다. 당장 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출만 늘 것이고 누군가가 크게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 성과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그 일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꽃무리들의 유일한 업적과 닮아있다.


그저 꽃을 피우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 쓸데없는 짓들을 하며 나를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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