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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조화 Oct 29. 2022

저층은 가격 방어가 안돼

땅보다는 하늘을 보고 사는 삶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보러 다닐 때였다. 사회 초년생이 난생처음 억 단위의 물건을 쇼핑하러 다닐 때 느꼈던 그 막막한 설렘. 한정된 예산 안에서 지역과 평수 등을 고려하며 머리를 싸매면서도 잊지 않았던 팁 혹은 고정관념이 있었다.

' 저층은 가격 방어가 안돼,
아파트는 무조건 로열층이어야지.'

그래도 나보다 먼저 집을 사고팔고 했던 부동산 선배인 부모님께서 딸이 첫 거래에 실패(?)할까 봐 걱정되셨는지 조언해 주신 말씀이었다. 나 또한 주워들은 것들이 있어서 큰 이견 없이 동의했다.


인생 최대의 쇼핑. 내부는 무난하니 합격!


미리 봐 두었던 아파트 단지 안에서, 평균 실거래가 기준에서 좀 더 높은 가격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고층 위주로 집을 보러 다녔다. 마지막으로 한두 개 정도 아예 다른 타입을 보기로 얘기가 나오는 중에, 중개사님이 조심스레 제안하셨다.


' 잔금 문제 때문에 이사가 급한 집이 있는데, 리모델링이 너무 잘 되어있고 깔끔해요. 가격은 2천이나 저렴하긴 한데, 층수는 3층이에요.'


혹할만했다. 2천만 원이나 저렴하다니. 남편도 일단 한번 보자며 흔쾌히 수락했다. 역시나 집은 깔끔했고 리모델링 스타일이나 가구도 신경 쓴 티가 나는, 집을 아끼시는 분의 공간인 것 같았다. 창가로 완전 가까이 가지 않아도 푸른 잎사귀가 흔들리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들이 주는 '혜택(?)'을 알아차리기엔 너무 어렸다.

'아까 본... 16층으로 계약하고 싶어요..!'


사촌 언니의 선물. 뭐라도 예쁘게 담아 먹으려고 했던 신혼



신혼생활은 참으로 달콤했다. 10년 연애한 남편과 드디어 통금 없이 늦게까지 먹고, 산책하고, 떠들며 아무 때나 잠들었다. 이삼일에 한 번꼴로 울던 나는 극심한 만성 우울증에서 1차적으로 빠져나왔었지만, 그래도 아직 사랑으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오피스 우울증. 몇 년째 ‘내 꿈’이 아닌 ‘남의 꿈’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업무를 해내고 또 해내도 채워지지 않는 타는 갈증. 그로 인한 무력감. 결혼으로도 이 부분이 해결이 안 되니 잠시 눌렸던 우울증이 방심하면 스멀스멀 찾아와 나를 흔들어놨다. 흔드는 대로 잔뜩 흔들어진 나의 몸과 마음 옆에는 언제나 그랬듯 무기력이라는 오랜 친구만이 남았다.


그 친구는 아침과 밤에 특히나 나를 더 단단하게 잡고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에서 붙들고나 있지, 얄밉게도 회사 때문에 잔뜩 지친 나의 퇴근길부터 쫓아와서 못살게 굴었다. 그 친구에게 붙들린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급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미뤄두었다. 운동이라든지, 배우고 싶었던 취미활동이라든지 말이다. 간신히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TV와 핸드폰을 통해 내가 아닌 남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웃고 울었다.


미니멀리스트의 집. 아니 무기력 환자의 집?

우리의 신혼집 인테리어는 심플했다. 나름 미니멀리스트라며 꼭 필요한 가전과 가구 외에 다른 인테리어 소품은 사지 않았다. 시계와 같은 기능적인 요소가 없다면 모두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식물도 들여놓지 않았다. 내 인생도 제대로 못 가꾸고 있는데, 모든 식물들은 사치품 같았다. 분명 친구가 운영하는 꽃집에서 플라워 클래스를 주기적으로 들었을 때 항상 꽃을 보며 행복해했음에도, 단순히 친구에 대한 의리로 꽃을 배웠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사치스럽다.


내가 분명 행복을 느꼈음에도 꽃과 화분은 그저 '관상용'이라고 치부해버렸고, 그로 인해 더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오히려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산 글쓰기용 노트북'과 같은 거창한 이유가 담긴 물건은 훨씬 가격이 비싸도 합리적인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행복을 준다는 그 푸릇하고 알록달록한 것들을 내 공간에 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그나마 선물로 들어온 스투키 화분 정도만 거실장에 올려두었었는데, 나의 철저한 무관심에도 잘 자라는 그 단단하고 늠름한 초록색 생명체는 한 번씩 눈에 띌 때마다 살짝 대견하긴 했다. 이 작은 생명체 말고는 우리 집엔 모두 필요한 물건들만 있었다. 이 신혼집 자체도 적은 금리의 대출로 알뜰히 마련한 로열층의 똘똘한 한 채였다. 나중에 매도할 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고층으로 고려한 것은 물론 일부러 1군 아파트 브랜드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무기력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볼 땐
내가 몇 층에 있는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는 인지도 되지 않았다.

앞 동 사람들이 우리 집 내부를 볼까 봐 창문 블라인드를 거의 내리고 살았고, 가끔 환기할 때 보는 하늘은 맑은 하늘보다는 미세먼지가 있거나 흐린 날이 더 많았다. 로열층이라며 저층이 아닌 고층을 선택하여 이사 왔는데, 나는 계속 무기력했다. 저 잡히지 않는 하늘과 가까워져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실제로 디딜 수 있는 땅과 자연에서 멀어지고 더 높이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던 나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창문 밖에서 아무런 에너지를 얻을 수 없었다.

우리의 집은 딱 창문까지,
철저히 25평짜리 면적의 집이었다.
집으로서의 기능도 딱 그만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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