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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호 Dec 17. 2023

[마음5]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마음


지독하게 미워해야만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결함까지 샅샅이 찾아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해서라도 곁에 머무르고픈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나는 사람을 잘 미워하지 않는다. 온갖 인간 군상을 포용하는 대단히 넓은 마음을 갖추었다기보다, 미워하는 일은 나 자신에게도 무척 피로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곱씹고 개탄하며 인류애를 소모하는 건 적잖은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안 그래도 노력해야 할 일이 지천인데 귀중한 노력을 그런 일에까지 소모하고 싶진 않다. 미워하지 않음은 나의 한정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인 셈이다.      


아주 간혹이지만, 그런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열렬히 미워하게 하는 것이 있다. 지구로 추락하는 운석처럼 일단 삶의 대기권에 진입하고 나면 쉽사리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나서야 종료되는 일. 바로 사랑이다.      


사랑과 미움은 아주 친밀한 한 쌍임을, 얼핏 모순으로 보이는 이 사실을 알려준 사람을 생각한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알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는 것처럼 달콤했다. 무엇이 그리도 달았느냐면 그의 혀끝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모두 그랬다. 일터에서 만난 고객이 얼마나 치사스러운지, 동경하는 연예인의 어떤 모습이 그를 설레게 하는지. 또 옛 연인의 과장스러움이 얼마나 치를 떨리게 했으며, 시시콜콜 치고받고 싸우는 가족이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관한, 그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인 이야기들. 돌이켜보면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렇지 않은가. 어떤 말을 입력해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출력되는 알고리즘이 생겨버린다.      


그가 했던 말들은 전혀 특별할 게 없고, 그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 또한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알사탕이 녹는 건 순식간의 일이니까. 하염없이 달았던 설탕 결정이 남긴 상처를 더듬으며 나는 단 것에 중독된 아이처럼 그에게 매달렸던 시간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절감했다. 단 것은 역시 몸에 좋지 않구나, 나를 병들게 할 뿐이구나, 그런데 죄가 있는 건 달콤한 게 아니라 그걸 무겁하게 집어든 사람이지, 하는 쌉싸름한 깨달음과 함께.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러했듯, 그와의 관계를 칼 같이 잘라낼 수 있었다면 지금의 깨달음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솔직할 수 없으므로, 어떤 이유에서라도 지속되어야 하므로 그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관계에는 균형이 중요한 법이다.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동일한 마음을 주고받을 때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원치 않는 사랑을 품고 있는 건 서로에게 폭력일 뿐이다. 내가 그를 미워해야만 했던 까닭을 변명하자면 그렇다.     


사랑했던 사람을 미워하는 일. 일견 몹시 어려운 일처럼 보이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지만, 막상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사랑했던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치환하면 된다. 너는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하는구나. 속마음을 참 쉽게도 털어놓는구나. 듣기보다 말하는 사람이구나.      


물론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의식은 제멋대로 탈선하기 십상이다. 그래,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했지. 어색한 침묵을 기꺼이 감당하는 배려심을,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는 솔직함을, 상대방이 마음을 터놓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나는 아주 동경했지. 그건 너의 무척이나 특별한 장점이고, 넌 언제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어이 사랑받을 테다. 그런 모습을 가진 넌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니까.      


바야흐로 그때가 미워하는 일을 종료할 때다.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평정한 마음으로 관계를 돌아볼 수 있을 때, 그제야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사이로 지낼 수 있다. 당신이 "참 좋은 사이"라고 부를, 그런 건전한 사이다.


하여 내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마음의 온도를 맞추는 일이다. 너무 뜨거운 물에는 데어버리고 말듯이, 지나치게 가열된 마음에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차가운 감정을 희석하는 것이다.


하여 내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마음의 온도를 맞추는 일이다. 너무 뜨거운 물에는 데어버리고 말듯이, 지나치게 가열된 마음에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차가운 감정을 희석하는 것이다. 이런 미움은 상대방을 해하지 못한다. 외려 누군가를 보호하는 일이다. 미워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나는 속으로 묻는다. 여전히 뜨거운가요? 그럼 당신을 더 미워해야겠군요. 너무 차가워질 것을 우려하진 않아도 됩니다. 딱 좋은 온도가 되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그런 온도가 되면 미워하는 일을 멈출 테니까요.     


곰곰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해서 그 사람의 곁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지속되어야 하는 관계란 어떤 관계인지, 그런 관계가 존재하기는 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이유란 없는데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을 때. 혹은 우리가 함께여서는 안 되는 백 가지 이유 틈에서 그 사람이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때. 그때의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지우기 위한 미움은 지난한 장기전인 경우가 많다. 갖은 노력에도 마음의 열도는 쉽사리 균형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양된 상태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만큼 감정의 골이 깊었고, 골의 깊이만큼 그 사람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방증이리라. 이럴 때면 누군가를 향한 감정은 성분보다 크기가 중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헤어날 수 없는 감정을 견디며 엄혹한 시간을 통과해야겠지만 이 시련은 영속적이지 않다. 미워하는 것은 힘이 드는 일, 다시 말해 노력이므로 언젠가 지쳐버리고 만다. 훗날 내가 또다시 누군가에게 휘둘리기를 자행한다면 오늘의 이 글을 꺼내어 스스로를 위로했으면 좋겠다. 감정이 탈진하기 전까지는 몹시도 미워하는 당신과 잘 지내보려 부단히 노력하겠지만.


설혹 당신이 나의 태도에서 달라진 점을 느낀다면, 발화하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전에 없던 서늘한 기운이 서린다면, 그건 내가 당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의 미움을 알아챘을 때, 나는 당신이 조금은 기뻐했으면 좋겠다. 그건 언젠가 내가 당신을 몹시도 사랑했다는 뜻일 테니. 


- 2023.04






마음 생태보고서



수심: ●●●●○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앤드루 포터 지음, 문학동네 펴냄)』 108p




[Playlist] 미워하는 마음 뒤의 진심

1. 다정함이 나를 - 프롬

2. 고백 - 박지윤

3. 거짓말의 거짓말 - 류수정

4. 사랑이 없는 이들은 로맨스 영화를 보지 않아요 - 4BOUT(어바웃) & 히모

5. 먼지 - 세븐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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