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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l Jul 07. 2021

보험

210707

꿈에 나오는 인물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니까 더블 캐스팅 같은 건데, 초반에는 어제 TV에서 봤던 사람이었다가 끝에는  친구로 바뀌어 있는 식이. 오늘 그랬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데 초등학교 동창 A가 길에서 보험 영업(?)을 하고 있었다. 어릴 적 양아치 기질이 다분했던 그와 눈이 마주쳤고 인사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잘 걸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걸음을 멈춰버리면 꼼짝없이 당할 거란 불길함이 든 나는 걷는 속도를 올렸다. A는 나와 걸음을 같이 하면서 보험을 팔기 위한 수작을 부렸다. 솔직히 보험 하나를 새로 들려던 차였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오랜만이랍시고 친한 척을 해대는 모습이 꼴 사나워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거절에 거절을, 그리고 또 거절을 했음에도 A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 건물에서 나온 거면 큰 회사 같은데 요즘 무슨 일을 하니, 앞으로 가끔 밥도 먹으면서 지내자,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난무했고, 나는 업무 전화를 받았다. 난 회사의 광고 모델 계약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 내용이 A 귀에 들어갔다.

- 계약하려는 모델이 누구야?

- 아, OOO인데 지금 계약 검토하고 있어.

나의 굳센 거절에 포기할 만도 했지만, A는 생각보다 독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다 내 집에 다다랐는데 슬슬 불안했다. 집 위치까지 들켜버리면 보험에 가입할 때까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A의 전화벨이 울렸다. 조용히 전화를 받던 A는 나와 거리를 두며 통화하기 시작했다. A의 얼굴은 심각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이 도망칠 기회라 생각했다. A가 읽어보라고 건넨 보험 상품 소개서는 손수 써 내려간 정성이 보여서 그냥 갖고 가기에도, 버리기에도 마땅치 않아 우왕좌왕했다. 옆에서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위에 얹어놓고 내뺐다. 문소리가 나지 않게 집으로 들어와 곧장 옥상으로 올라가서는 A의 동태를 지켜봤다. 통화를 마친 A는 어슬렁대며 내 집 앞까지 당도했다. ‘내 집을 어떻게 알지? 초등학생 때 쟤랑 논 기억이 없는데…’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A는 나의 인기척을 느끼려는 듯 천천히 내 집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A는 내가 조용히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계속 문을 두드리는 걸 참지 못한 나는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었다.

- 아 보험 안 든다고!

문을 여니 A는 군대 후임 B로 바뀌어 있었다. 후임이지만, 동갑이었던 B는 좋은 사람이었고, 친하게 잘 지냈다. 그런 B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만약 길에서 보험 영업을 하던 사람이 A가 아닌 B였다면 나는 안 그래도 보험 하나 들으려 했다고 말하면서 선뜻 도와줬을 게다. B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나는 소리를 지르며 거절했다. B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다가 곧바로 미소 지었다.

- 알겠어, 생각 있으면 연락 줘. 그리고 이건 필요할 때 써.

B는 검은 가방을 내게 건넸다. 묵직한 가방의 지퍼를 여니 아까 친구에게 말했던 광고 모델이 한 인터뷰에서 읽고 싶다고 말했던 책 몇 권이 있었다. 알고 보니 아까 친구가 한 통화는 후배에게 그 책들을 사 오라는 말이었다. 고작 나한테 보험 하나 팔려고 그 잠깐 사이에 이것들을 준비했다니, 무안해진 나는 되레 화를 내며 가방을 돌려줬다. B는 더욱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나는 마침 보험 하나 들려고 했다는 말은 차마 못 했다. 조금 전까지 무례했던 내가 지금에 와서 보험을 든다고 하면 B는 그것을 동정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서였다. 나는 B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사과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B를 따라갔고, 이내 등을 토닥이니 B는 주저앉아 소리 내며 울었다.

- 미안해.

나는 한두 달 뒤 B에게 전화해서 보험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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