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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 퍼스트 Apr 23. 2018

역사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 남북정상회담

[TF Guide_정치용어]

역사적인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남북한의 지도자가 만난 사례는 단 두 차례뿐이다. 65년째에 열리는 이번 회담이 이제야 3번째다. 그만큼 기약 없이 이뤄지는 진귀한 이벤트다. 두 사람이 만나 악수하고 껄껄 웃으며 합의문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개월에서 많으면 수년까지도 소요된다. 이 과정에서 남북 양측의 기싸움과 주도권 다툼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합의 직전에 물거품이 되거나 갑작스런 약속 불이행 등으로 어그러지는 일도 허다하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 집. (사진: 2018남북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일까

일단 정상회담의 의미부터 짚고 가자. 정상회담이란 각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대통령·총리·수상·수반·주석·총통 등)들이 만나는 행위다. 일반적으로 ‘일 대 일’ 회담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3자·4자 회담도 있으며, G20정상회의 같은 경우도 정상회담의 범주에 들어간다. 한 국가의 정부를 대표하는 지도자, 즉 ‘정상’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은? 국내법 기준으로 보면 정상회담의 기준에서 어긋난다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명시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북한 지역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북한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38도선 이북 지역을 무단으로 점령 중인 반(反)국가단체라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과 반국가단체 대표자의 만남을 정상회담으로 명명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주로 보수 진영에서 나오곤 한다.

하지만 헌법상의 규정과는 별개로 이미 박정희 정권 이래로 북한을 사실상 국가로 인정하는 정책을 이어온 터라 정상회담이라고 칭하는 것에 자체를 문제 삼는 이들이 이제는 많지 않다. 대신 한미·한중 정상회담처럼 한북 혹은 한조(선) 정상회담이라 하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이라 부르는 것에는 여전히 남북한을 다른 나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 2018남북정상회담)



2000년과 2007, ‘유이했던 만남

남북한 정상들은 앞서 두 차례 만났다.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장기집권 하는 동안 우리 측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이어 북한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0년 정상회담은 김 전 대통령이 6월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평양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이뤄졌다. 분단 이후 남북 정상의 첫 만남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국민적 기대와 세계적 관심이 쏠렸다. 김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하며 역사에 남을 6·15공동선언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남북은 그해 초부터 중국 등에서 수차례비공개 실무 협상을 갖고 정상회담 일정과 의제 등을 논의했다. 실무진은 상대측 정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이뤄지고 난 이후에도 크고 작은 갈등은 계속됐다. 공동선언문의 북측 서명자를 두고 남측은 김 위원장의 이름을, 북측은 김 위원장이 아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충돌했다. 여기에 북측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 참배를 요구한 반면 남측에서 이를 거부하면서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다.

2007년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사진: 2018남북정상회담)


2007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최초의 한국 대통령으로 기록됐고, 10·4공동선언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7년 전 이미 한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던 터라 과정은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그러나 당초 8월에 열기로 했던 정상회담은 수해로 인해 밀리고 밀려 10월에야 간신히 열릴 수 있었다. 또한 1차 정상회담과 달리 노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면서 합의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


부러진 화살, 피우지 못한 꽃

그나마 위의 두 경우는 실제 정상회담과 합의문 발표가 이뤄진 사례다. 추진 혹은 논의 단계에서 어그러진 사례는 부지기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3년차인 1994년 7월25일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데 합의를 이뤄냈다. 하지만 보름가량을 남겨둔 8일 김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이후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올라가고 북한에서 새 정권 구축 작업에 들어가면서 정상회담은 없던 일이 됐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도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 국무부 기밀자료에 따르면 실무급 접촉이 있었고, 북한 측에서도 MB정부가 회담을 제안했다는 북한 국방위원회의 발표도 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한 핵심 인사가 북한 통일전선부장인 김양건을 만나 정상회담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양건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협상이 멎었고, 이후 북한의 핵실험이 이어지면서 논의는 결렬됐다.

청와대에 설치된 남북 정상 간 직통전화. ‘핫라인’이라고도 한다. (사진: 청와대)



|기로에 선 역사, 갈림길에 선 우리

11년 동안 중단됐던 남북정상회담이 오는 27일 열린다. 지난 2000년과 2007년의 정상회담이 정치적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면, 이번에는 실무적인 부분이 많이 보강됐다.

그동안 남북 모두 지도자가 바뀌었고, 비핵화는 피해갈 수 없는 의제가 됐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도 임박했다. 지난 두 차례의 회담으로 물꼬를 트였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 해결을 둘러싼 기로에 섰다.

이번 회담에서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못할 경우 북미정상회담 역시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현 정부와 북한에 대한 불신이 치솟는 동시에 ‘남북정상회담’ 무용론까지도 나올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공방이 격화되면서 사회적 혼란까지도 예상된다.

반면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종전 선언 등이 담긴 합의문, 그리고 구체적인 ‘액션 플랜’이 제시된다면 전 세계가 열광할 수 있다. 연이어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질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통일의 첫 관문인 ‘정치·군사적 긴장상태’의 해소를 기대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글: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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