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Story
(※이 글은 다소 더러움을 포함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장기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혹은 장이 예민하다.
이에 해당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합니다.
지사제를 꼭! 꼭!! 꼭!!! 챙기십시오.
남미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체력 빼면 시체인 나는 웬만한 일들로 지치지 않았고, 아픔에도 무딘 편인지라 언제 생긴지 모를 잔상처들은 침을 바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있었으니…. 바로 물·갈·이…!
남미로 떠나오기 전 여행을 계획 중인 사람, 여행 중인 사람, 혹은 여행을 마치고 향수병을 앓는 사람 등등 많은 이들이 남긴 글을 읽었더랜다. 세상사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여행 또한 정보력 싸움이기에! 나는 '계획 중인 사람'에 속했으니, 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몇 번이고 들여다본 글은 다름 아닌 누군가가 정리해둔 준비물 리스트였다.
꽤나 친절했던 글이었다.
「도시별 일교차가 이러하니 사계절을 다 겪는다고 생각하고 옷을 챙기세요. 멀티 플러그는 요 브랜드가 좋으니 링크를 걸어두겠어요. 입맛이 까다로우시다면 비상용 컵라면을 꼭 챙기되 내용물을 분리해서 가져가면 부피가 확 줄어든답니다. 마지막으로 비상약을 꼭 챙기셔야 하는데, 타이레놀과 감기약. 그리고 지사제는 필수라고 보셔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비장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아무런 댓글이 달리지 않은 글이었지만 조회수가 꽤나 높았으니, 천사 같은 글쓴이님의 조언을 따라 짐을 꾸리는 이들이 꽤나 많았으리라. 나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종류의 약은 뜯지 않은 박스째로 챙겨온 참이었다.
재앙은 예고치 않게 찾아온다 하여 재앙이던가.
분명 와라즈에서 이카로 넘어올 때까지는 내내 잠잠했던 뱃속이 쿠스코로 넘어가는 버스에서부터 요상한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360도 헤드뱅잉을 하며 단잠에 빠져있었건만 왠지 모를 위화감에 잠에서 깼다.
그때부터였을까. 자고 있던 몸뚱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니 꾸에엑! 꾸륵꾸륵! 하며 괴상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다행이라 함은 대부분의 도시 이동 버스에는 화장실이 갖춰져있다는 점과(위생은… 잠시 제쳐두자.), 불행이라 함은 끊임없이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게다가 언제 급정거할지 모르는…! 좁디좁은 그곳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배탈이 났나 보다 싶었으나, 날이 갈수록 갑작스러운 배탈 공격의 빈도수가 잦아지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물갈이구나!
물갈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로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숙소에선 언제 신호가 올지 모르니 맘 편히 눕지도 못했고, 뭘 먹긴 해야 하는데 이 음식은 또 어떤 아픔을 선사할까 싶어 겁이 날 정도였다. 가장 아찔했던 건, 투어 일정 도중 화장실이라곤 보이지 않는 대자연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상황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하루에 다섯 번쯤 화장실을 찾게 되니 '아씨…. 이러다 남미에서 치질 수술하는 거 아냐?' 휴지를 손에 꽉 쥔 채 이런 생각이나 했더랜다. 다시금 그때만 떠올려 보면…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진짜 딱 죽을 맛 그 자체였다.
난생처음 먹어본 지사제 한 박스에 들어있던 여덟 알 중 여섯 알을 비우고서야 잦아든 배앓이에 그나마 병원행은 면했다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후 몇 번의 국경을 넘고 완전한 도시로 가까워지면서부터 더 이상 약 먹을 일은 없었으니, 남아있던 지사제는 그때의 나처럼 물갈이를 호되게 앓고 있는 여행자에게 쥐여주었다.
약을 받아든 여행자는 드릴게 이것밖에 없다며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건네더이다. 어떻게든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 하는 그에게 한바탕 웃으며 이런 귀한 걸 주시다니요! 하여간 요긴하게 쓰겠다며 내 주머니로 쏙 넣었다.
누군가 '여행을 떠나는데, 뭘 챙겨야 하나요?'하고 물어본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제일 먼저 외칠것이다. 지사제요! 손수 남미에서 얻은 교훈이랍니다. 비록 원치않은 고통을 수반한 쓰라린 교훈이었지만 말이죠. 우리의 장은 소중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