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미 Sep 14. 2023

한낮의 도난 사건

Rio de Janeiro, Brazil

“악!”

한순간이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것은.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몸의 떨림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스치고 간 목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건너편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갈비뼈가 보일 만큼 비쩍 마르고 팔이 징그럽도록 긴, 새까만 눈동자만이 간신히 보이는 흑인. 그놈 손에 들려있는 것은… 처참하게 뜯겨진 내 목걸이였다.




"성희야, 니 브라질 간댔제?"

브라질로 출발하기 몇일 전, 남미 여행의 첫 동행자이자 신기할 만큼 몇 번의 우연이 겹쳐 자주 인사를 나눴던 P언니에게서의 연락이었다. "네!" 하고 짧게 대답하기 무섭게 언니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며칠 전에 브라질에서 칼부림 난거 아나? 다친 사람이 한국사람이라든데 지금 의식불명이라드라. 니 간다는 거 생각나서 연락해 봤는데, 별일 없제?"


그만큼 브라질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피해야 할 1순위 위험지역이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길거리 시위로 한창 어수선한 분위기이니 되도록이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주변에서 말릴 만큼 치안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까. 하루를 꼬박 고민했으나,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이동 루트였기 때문에 이미 끊어 놓은 비행기 표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않고 사람 많은 곳으로 다니면 되겠지.' 이런 안일한 생각이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고.


내가 떠나온 모든 여행을 통틀어 겪었던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한다면, 볼리비아 라파즈의 빼곡한 인파로 복작이는 시장길을 지나오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백팩의 지퍼가 활짝 열려있던 일 정도였다. 지퍼를 단단히 잠군 것은 확실했고, 뒤에서 아무런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만다행이라면 여권과 카메라가 버젓이 들어있었는데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기에 운이 억세게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말 그대로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었다. (그 이후로 백팩은 무조건 앞으로 메는 습관이 생겼다.)


스스로 약속한 대로 브라질에서의 모든 일정은 해질녘을 넘기지 않았다. 같은 방을 쓰던 모두가 외출한 뒤에야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던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캄캄해지기 전 돌아와 저녁 대부분의 시간을 호스텔에서 보냈다. 그래서 더더욱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철썩 믿고 있었다.


한낮의 브라질은 내가 상상했던 대로 뜨거운 열정과 활기로 가득 찬 나라였다. 에너지 넘치는 젊은이부터 노련한 노인까지 한 팀이 되어 춤을 춘다든지, 노래를 부른다든지 보는 이를 유쾌하게 만드는 버스킹을 꾸리고 있었으며 문화의 장이 열린 거리를 보니 경계심이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덧붙이자면 곳곳마다 근무 중인 경찰들이 꽤 많았기에 더더욱.


도심 속을 벗어나니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듯했다. 넓게 펼쳐진 코파카바나 해변의 파도 소리가 듣기 좋은 백색소음처럼 들려왔다. 바다 곳곳에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의 신난 표정을 보고선 '수영복을 못 챙겨와서 아쉽네. 오늘은 여기서 저녁노을까지 보고 들어갈까?'라고 한껏 풀어진 생각을 하며 해변을 거닐었다.


다섯 발자국 앞 정도의 거리에서 휘청휘청 걷고 있는 사람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이 너무 많았다. 사고는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다 하여 사고라 하던가. 누군가 지어놓은 모래성을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틀던 그때, 내 목을 턱! 잡는 커다란 손의 감촉과 우두둑 소리를 내며 무언가 뜯겨져 나가는 생경한 감각에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상황이 파악되기까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몸과 빨갛게 부어오른 목은 둘째치고, 우선 내 목이 몸에 제대로 달려 있다는 것에 안심 아닌 안심을 하며 차도 건너편을 보니, 내 앞을 휘청거리며 걷던 흑인. 그놈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놈은 무표정으로 내 목걸이를 내보였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죄책감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낯짝에 소름이 돋았다. 소매치기를 한두 번 해본 놈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여기서 그놈을 쫓아간다면 더 큰 변을 당할 수도 있을 거라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일어서려고 해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느꼈던 공포감이 분노로 바뀌어 갈 때 즈음, 저 멀리서 경찰이 걸어오는 걸 보고 나서야 그놈은 유유히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찰도 나를 일으켜주는 것 외에는 도와줄 수 없었다. 브라질에서 소매치기란 현지인도 당할 정도로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며, 오히려 자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다고. 큰 상해를 입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위로는 내게 하나도 위로가 되질 않았다. 그저 한낮에, 게다가 경찰이 있는 길거리에서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곳이었다는 사실이 브라질에 있는 내내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이후 모든 일정을 접고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 걷는 내내 현실감 없이 멍한 기분이다. 방금 일어난 일이 사실은 악몽 아니었을까? 문득 손으로 쓸어내린 목에는 걸리는 것 없이 휑할 뿐이었다. 그날 밤, 조금 안정을 되찾은 후 뒤늦게 내 소식을 전해 들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차례로 연락이 왔다. 괜찮아? 다치지 않았니? 많이 놀랐겠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좀 많이 놀라긴 했지만.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휴, 에휴 속상함의 한숨 소리가 참고 있던 내 눈물샘을 건드렸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들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애석하게도 지구 반대편의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시금 씩씩한 목소리로 몸 조심히 남은 여행을 마치겠다는 맹세와 곧 돌아가면 만나자는 약속뿐이었지만 말이다.

이전 15화 지사제로 대동단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