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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Sep 21.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Mexico City, Mexico

(전편의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한낮의 도난 사건을 겪은 이후로 나는 모든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옆을 스쳐가는 누군가는 나를 노리고 다가오는 것만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하고, 도시를 둘러싼 크고 작은 소음들에 한껏 움츠러들었으며,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이에게 잔뜩 굳은 표정과 무미건조한 말투로 "노 땡큐." 한마디를 남기고 차갑게 등을 돌릴 뿐이었다.


하나의 사건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70일 가까이 남미 여행을 하며 여태껏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야말로 행운이었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그간 들려오지 않았던 불상사와 온갖 사건사고를 알리는 뉴스들이 귀로 흘러 들어와 콕콕 박혔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지나치게 단조로워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이동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호스텔에서, 배정받은 방에서, 한 칸짜리 침대에서 스스로를 가둔 채로 여행의 끝자락을 버티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멕시코로 넘어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도, 멕시코에 도착해 숙소로 향하던 순간도 굵직한 궁서체로 쓴 '건들지 마시오' 경고문을 이마에 써 붙인 듯 잔뜩 인상을 쓰고 다녔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쿵쿵 소리를 내고 걷는 모양새가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몸집을 한껏 부풀린 겁쟁이 신세가 따로 없었다.


전철을 타는 순간에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왕 수족냉증인 내가 손바닥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범벅이 된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더랜다. 경계태세를 낮추지 않은 채 혹여 열차를 반대 방향으로 타지는 않았을까,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버리진 않을까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역 하나하나를 멈춰 설 때마다 내리는 사람은 없이 타는 사람만 있었기에 마치 밀봉되기 전의 통조림 속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발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니, 내릴 때까지라도 무탈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왔을까. 언제까지고 엉겨있을 것만 같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한껏 넓어진 공간 사이로 그제야 미지근한 바람이 통했다. 문이 닫히며 한순간 훅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찰나, 맞은편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출입문의 왼쪽 끝에, 그는 오른쪽 끝에 서있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시선이 맞닿았다. 지나쳐온 수많은 사람들 중 독보적으로 키가 컸기 때문일까? 그는 서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생긋 웃으며 눈인사를 건네는 그와는 달리 나는 바짝 경계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보였다. 그가 무안함을 느낀대도 어쩔 수 없었다.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차창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 내릴 때가 되었나 보다 싶었으나 그는 지나가던 잡상인을 붙잡고 무언가를 주고받는 듯했다. 뒤이어 우리가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히며 성큼 다가와 손에 쥔 것을 내게 불쑥 건넸다. 푸른색으로 번쩍이는 그것은… 다름 아닌 초코바였다.

'나?' 깜짝 놀란 마음과 말은 속으로 삼키며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니 그가 끄덕인다. 영 난감한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는 두 개의 초코바를 뜯어 시원하게 한입 베어 문 후 '먹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이 입에 대지 않은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 정도 호의라면… 그 어떤 냉혈한이라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심스레 받아드니 그는 제 자리였던 양 출입문 오른쪽 끄트머리로 돌아가 기대어 서서 말없이 초코바를 먹었다. 가끔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며. 그를 따라 한입 베어 문 초코바는 퍽 달콤했다.


출입문 끄트머리를 먼저 떠나는 사람은 나였다. 그에게 다 먹은 초코바 봉지를 보여주며 "땡큐." 짧은 인사를 했다. 그는 만족했다는 듯 이전보다 더 큰 미소를 보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Have a good trip". 그는 무슨 마음으로 어색한 미소를 보인 이를 위해 지갑을 열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시선을 모른체한 이에게 초코바를 건넸을까. 무엇 하나 헤아릴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마치 '너의 앞날엔 좋은 일만 일어날 거야'하고 걸어준 행운의 주문처럼 느껴졌다는 거였다.


어느 깊은 밤, 라파즈에서 만났던 여행자와 나눈 대화가 문득 떠오른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시에서 야경을 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왜 여행이 좋으세요?' 온갖 오지를 다니며 세계 일주를 꿈꾼다는 그에게 물었다. 모든 것에 초연해 보이기도, 쓸쓸해 보이기도 한 그의 옆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그는 꽤나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던 것 같다. '사람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굳이 삶의 터전을 벗어나 모르는 타인들과 부대끼는 것이?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의 말을 이해하기엔 생략된 이야기가 많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의 이유를 감히 짐작할 수 없기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뒤로한 채 그렇군요. 짧은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지금이라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좋아서 여행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을. 그저 이방인일 뿐인 나에게 다가와 당신이 남기고 간 흔적이 가슴 깊이 스며드는 순간을 다시금 맛보고 싶어서.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만들어 준다는 걸 이제는 알아버렸으니까.


내게 남은 여행 기간은 단 3일. 지나온 67일이 얼마나 순식간이었는지 아는 여행자는 더없이 귀한 3일이다. 어물쩍거릴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브라질의 그놈이 빼앗아간 것은 목걸이 하나면 족하다. 저주 같은 그 사건에 얽매여 다시없을 이 순간마저 도둑맞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남아있던 미운 마음일랑 바람에 실어 멀리 떠나보내고 마는 것이다.

고산병으로 늘어져있던 내 손에 약을 쥐여주던 호스텔 직원,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나에게 노래를 선물해준 음유시인, 잔뜩 움츠러든 내게 성큼 다가와 달콤한 초코바를 건넨 오른쪽 끄트머리의 그 사람….


당신들이 내게 남긴 것은 평생의 추억, 앞으로 나아갈 용기라는 것을 알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앞질러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행운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걸어갈 앞날엔 설레는 마음만 가득하므로.


이름도, 나이도, 행방도 모르는 그대들이여. 그대들로 하여금 나는 또 오늘의 여행을 떠난다. 아마도 평생 어딘가로 떠나는 일을 멈추지 않을 테니, 낯선 길 위 다시금 내가 외로워질 때. 따스함이 필요할 때 어김없이 그대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겠다. 그러면 나는 나를 가로막는 일들이야 있을지언정 항상 충만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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