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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Nov 28. 2023

1인 가구는 아프면 안돼

엉엉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살면서 만나본 적 없는, 아주아주 독한 놈으로.


오한으로 새벽 내내 잠을 설쳤고, 겨우 지쳐 잠들었더니 머리가 띵하도록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강제로 눈을 떠야만 했다. 책임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겁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만 한다. 헝클어진 이부자리에 물 한 컵 쏟은 것 마냥 흥건하게 젖은 베개와 이불을 보니, 마음은 심란하기만 하다.


세면대 거울 너머 비치는 몰골이 말이 아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과 얼굴.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의지와 상관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컨디션으로 판단해보건대, 이건 도저히 출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30년 인생. 사회인이 되고서 처음으로 써보는 병가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마냥 몽롱한 기분으로 비척비척 걸었다. 고작 500m 거리를 걸어오는데도 30분이 넘게 걸렸다. 독감이 유행이라더니, 접수처에는 나를 포함해 새하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갓난쟁이 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남녀노소 뒤죽박죽이었지만, 모두를 세 단어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훌쩍. 콜록. 추욱.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프다는 사실이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마를 새 없이 흐르는 식은땀 줄기가 등판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아, 집 가서 얼른 씻고 싶은데. 진료 보고 집까지 걸어가면 씻을 기력조차 없을 것 같다. 그럼 일단 약 먹고 한숨 자야지. 약 먹으려면 빈속은 안되니까 뭘 좀 먹어야겠지. 죽이라도 사서 가야 하나. 근데 죽집이 어디 있더라... 난무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몸은 물먹은 솜 마냥 무거운데 머릿속의 나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안내받은 진료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인자한 인상의 선생님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독감 환자 매뉴얼을 읊기 시작한다.


'지금 증상이 어떻게 되세요? 키트로 코로나 검사해 보셨어요? 안 하셨으면 코로나 검사는 6만원이고요, 독감 검사는 4만원입니다. 아, 키트 해보셨다고요? 그럼 독감 검사를... 아, 필수는 아니고요. 회사에 증명서 차원으로... 필요하지 않으시다고요. 그럼 잠깐 입안 좀 확인해 볼게요~ 3층 주사실에서 수액 맞고 가시고요, 약 먹고 3일 뒤에 낫지 않는 것 같으면 다시 방문하세요.'

- 네. 근데 선생님. 수액은 보험인가요, 비보험인가요. 병원에 또 올 수 있는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서 그런데, 약은 5일 치로 처방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보험료 청구 진단서는 앞에서 받아 가면 될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아파서 죽겠는 와중에도 지갑 사정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돈이 쪼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계산해놓은 고정 지출과 한 달 치 식비, 용돈 예산을 한 번 더 재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이쯤 되면 혼자 사는 사람은 아프면 큰 죄를 짓는 것만 같다. 오늘 하루만 해도 진료비, 약 값, 수액 값, 죽 값까지...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지끈거린다. 아프면 서럽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코끝이 찡해진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었다.


평일 대낮에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자니 기분이 요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사무실에 앉아있을 시간일 텐데, 몰래 농땡이 피우는 불량 직장인이 된 것만 같았다. 금방 뒤따라 들어온 간호사님이 알코올 솜으로 팔을 문지르며 '자, 힘 빼세요.'라는데,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상상하니 한번 긴장된 몸은 힘이 풀릴 생각을 하지않는다. 왜 이놈의 상상력은 이럴 때 풍부해지고 난리인가.


주삿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오는 생경한 감각. 취해버릴 것 같은 병실의 알코올 냄새. 기다란 줄을 타고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수액. 주사 맞는 일이야 살면서 몇 번이고 있었으나 1인 가구를 자처하면서,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뀐 이래로 이렇게 아픈 일이 처음이었으니 서럽기 짝이 없다. '나 이만큼이나 아파'라고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으므로, 아픔과 설움을 감당하는 것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자니, 무언가 열심히 설명해 주시던 간호사님도 당황하셨는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조용히 불을 끄고 나가셨다. 그제야 한 번 참았던 감정의 너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쳐흘렀다. 엉엉. 열 올라서 머리 아파. 코 막혀서 숨도 잘 안 쉬어져. 집까지 또 어떻게 걸어가. 거지 같애. 아픈 거 너무너무 싫어. 속으로 온갖 짜증을 씨부렸다.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내 가방 안에는 지퍼백에 수납된 몇 장의 마스크와 알록달록한 알약, 분홍색 시럽 약이 함께했다. 하루 중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시간은 밥을 먹고, 식후 30분의 약을 먹을 때뿐이었다. 약 하나하나의 효과는 몰라도, 하루빨리 '내 몸이 제 기능을 하게 해주겠지'하는 믿음으로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시럽 약이 딸기맛이어서 후식이다 생각하고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하. 독감 퇴치 3종 세트가 가방을 차지하는 면적이 줄어들면서 언제 아팠냐는 듯 컨디션도 정상 궤도에 오른 듯하다.


다행히 제일 비쌌던 수액은 보험 처리가 되었고, 빈속에 약을 먹으면 안된다는 핑계로 너무 잘 챙겨 먹는 바람에 몸무게가 2kg나 불었다. 혈색이 좋다 못해 때깔이 고와진 것도 같다. 독감도 걸리고 볼 일이다. 아니다. 이제 아픈 건 지긋지긋하다. 내 몸아, 미안해. 그간 미뤄왔던 운동도 다시 시작할게. 그니까 다신 아프지 말자. 나 혼자니까 좀 봐줘. 꼭이야.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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